제목
  의병장 황병학 의사의 백운산 항일운동 재조명
부제
  의병장 황병학 의사의 백운산 항일운동 재조명
일시
  2019.04.27
작성일
  2019-07-13
조회수
  15

   
 
 
 
2019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학술대회
2019 National Conference by
the Institute for East Asia Peace Studies (IEAPS)

◈ 의병장 황병학 의사의 백운산 항일운동 재조명
󰋮 일시 : 2019. 4. 25(목) 15:40-19:00

󰋮 장소 : 대한상공회의소 의원회의실(지하 2층)

󰋮 주최 : 사단법인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 후원 : 의병장 황병학 의사 기념사업회

사단법인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 초대의 말씀

의병장 황병학 의사는 일제에 항거해 무장투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의 이름이나 삶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희 연구소는 3ᐧ1운동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창설 100주년을 기념하여 일제강점기 광양 백운산을 거점으로 포수 100여명을 포함하여 총 25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일제에 항거하였고, 만주와 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의병장 황병학(1876-1931,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선생의 항일의병사를 재조명하기 위해 이 학술회의를 개최합니다, 특별히 황병학 의사의 아들(황봉현: 학도 의용군 출신), 손자(황호걸: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이어지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3대 보훈명가를 소개하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희 연구소는 2013년에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현대적 함의’, 2017년에는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와 한중관계’ 주제의 학술회의를 실시한 바 있습니다. 금년에는 황병학 선생의 업적을 조사하고 발굴해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이 학술회의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학술회의에 참여하여 일제강점기 우리 선열들의 값지고 희생적인 항일운동의 역사를 다시금 생생하게 되새기는 기회의 장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이 사 장 정병호
연구소장 이재형

◈ ◈ 학술회의 식순

◈ 제 1부 등록 및 상호 인사
▶ 15:40-16:00 등록 및 인사


◈제 2 부 학술회의
▶ 16:00-16:05 환영사 : 연구소 이사장 정병호
▶ 16:05-16:15 학술회의 배경 및 취지 : 연구소 소장 이재형
▶ 16:15-16:20 회의 배경, 발표자 토론자 소개: 사회자
(인천대 교수 이재석)
▶ 16:20-16:45 발표 1 (김수빈 : 전남 지역 국가공무원)
‘광양출신 의병장 황병학 백운산을 붉게 물들이다’
▶ 16:45-17:15 발표 2 (성신여대 명예교수 방영준)
‘의병운동의 이념적 특성과 현대적 의의’
▶ 17:15-17:25 휴식(coffee break)
▶ 17:25-17:35 토론 1 (오 연 : 한국외대 박사과정 학생)
▶ 17:35-17:45 토론 2 (허춘화 : 성균관대 박사과정 학생)
▶ 17:45-17:55 발표자, 토론자 질문에 대한 답변
▶ 17:55-18:00 참석자 질의 및 응답
▶ 18:00-18:05 감사 인사 : 황병학 의사 기념사업회 대표 황호부
▶ 18:05-18:10 사회자 결론 및 폐회
▶ 18:10-19:10 만찬


◈ 학술회의 배경 및 취지 : 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이재형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학술회의를 주재하는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 이재형입니다. 저희 연구소는 몇 년 전에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에 대한 학술회의를 주관한 바 있습니다. 오늘은 ‘의병장 황병학 의사의 항일운동 재조명’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합니다. 이번 행사는 저와 매봉산 조기배드민턴 동호회 회원인 SM투자자문 황성민 대표이사와의 대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지난 3월 초 황 대표로부터 할아버지인 황병학 의사의 헌신적이고 영웅적인 항일의병 활동에 대한 숨은 얘기를 듣고, 이 학술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할 때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 까요. 두 가지 길을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나는 안일한 불의의 길을 택해 개인의 명예와 재물을 탐하여, 그것을 후손에게 대물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해 자기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국민의 행복과 안녕을 지키고, 국가를 보존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의병(義兵)이란 외적이 침략하여 나라가 위급할 때 민중이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외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구국 민병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의병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지만, 1895년 을미사변부터 1910년 8월 국권이 피탈될 때까지 가장 활발했습니다.

바로 이때 일본군 압박이 허술한 삼남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봉화처럼 활활 타올랐는데, 그 중에서도 광양 백운산 일대에서 일어난 황병학 의병장의 거사는 규모면에서나 전과 면에서도 괄목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원래 한학을 배우면서 백운산에서 포수를 해 왔던 분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활을 잘 쏘아, 광양과 하동 일대의 포수들을 쉽게 규합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될 수 있었고, 백운산 깊은 계곡에서 야철로를 만들어 무기를 제작함으로써 당대에 보기 드문 250명 규모의 강력한 의병부대를 만들어 일제에 항거했습니다.

황병학 의사는 의병장 출신이면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침에 따라 활동함으로써 의병인 동시에 독립유공자가 된 분입니다. 황병학 의병장의 빛나는 공적은 발표자와 토론자의 몫이기 때문에 저는 간단한 소개만 드렸습니다.

지금까지 파악된 일제 강점기의 독립유공자는 약 17,000명으로 추산됩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독립유공자의 경우 후손 3대까지 합당한 예우를 하겠다는 현 정부의 정책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을사오적이 나라를 일제에 송두리째 팔아넘긴 후, 이들에게 부화뇌동하는 친일 세력들은 무자비한 방식으로 자국민을 탄압함은 물론, 백성들을 학병, 강제징용, 위안부로까지 내모는 천인공노할 죄악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8ᐧ15 해방이 되자 대다수 국민들은 거국적으로 해방의 감격에 환호했지만, 이와 달리 한없는 허탈과 절망, 그리고 공포 속에서 숨어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으니, 저들이 바로 친일파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해방이 되자 관공서, 경찰서 등에서 한 달쯤 자취를 감추었다가,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그들에게 ‘현직에 돌아와 복무하라‘는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마치 자기들 세상이 다시 온 것처럼 의시대면서 공무원, 경찰 등으로 복직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안타깝게도 이들 친일세력을 척결하지도 못 하고 독립을 맞았습니다. 지난 2월 한국갤럽은 여론조사에서 우리 국민 80%는 아직 친일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했으며, 청산 안 된 이유는 친일파가 정치인, 고위공무원, 재벌 등에 많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50%였습니다. 아직도 친일파의 재산은 여전히 대물림되고 있으며, 그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호의호식하면서, 신성한 국방의무까지도 교묘하게 회피하려는 현실을 보면서 역사바로세우기는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의 친일파 척결은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처단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프랑스는 해방 직후 나치 협력자를 국가반역죄로 다스려 6,763건 사형을 선고해 767명에게 사형을 집행했으며, 종신 강제노동 2,072명, 무기 강제노동 1만631명 등으로 처벌했습니다. 또한 군 장교와 공무원 12만 명도 쫓겨났으며, 언론사 538개도 재판에 회부돼 이중 115가 유죄선고로 폐쇄되었습니다. 중국도 친일파를 ‘한간’이라 부르며 14,932명의 형을 확정하고 359명의 사형을 집행하고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는 반민족행위처벌법, 소위 반민특위법이 1948년 9월에 제정되었으나, 공소시효를 1949년 8월로 앞당기고 특별조사위원회·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를 해체하고, 그 기능을 대검찰청과 대법원에 이관했다. 1950년 4월 25일 본격적인 친일파 재판이 시작되었으나, 특별재판관 22명 중 독립운동가는 김병로, 김장렬 등 4명뿐이고, 8명은 일제의 법조인 출신이었으니 죄인이 공범자를 심판한 것과 진배없었습니다.

기간 중 680여 명이 조사를 받았으나, 결국 집행유예 5인, 실형 7인, 공민권정지 18인 등 30인만이 처벌을 받았고, 실형의 선고를 받은 7인도 이듬해 재심청구로 모두 풀려나 결국 구호에만 그친 친일청산으로 끝나버린 것입니다. 친일은 반성해야 할 일이고, 의병 활동과 독립운동은 예우 받아야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를 우리는 소홀하게 지나쳐 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또한 우리는 이제 와서 일본에 과거의 상처를 헤집어 갈등요인을 만들자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죄악에 대해 진정한 사과도 없고, 보상도 안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우리 땅 독도를 그들의 초ᐧ중ᐧ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에 자기들 영토로 기재했으며, 1939년부터 45년까지 조선인 100만 명 이상을 강제로 징용하고도, 1990년 6월 강제징용 한국인은 총 66만 7천여 명이라고 공식 발표했을 뿐, 이들에 대한 어떤 보상도 외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12세에서 40세의 여성 약 20만 명을 강제로 동원하여 군수공장에서 일하게 하거나, 군대 위안부로 보내는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위안부에 대해서는 그 실체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의 진정한 사과로 한일 양국은 이제부터라도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라, 가깝고 절친한 이웃으로 거듭나, 동아시아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공동보조를 맞춰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의병과 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실체를 발굴하고, 목숨을 바친 선열들과 그들의 후손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민족적 아량과 사랑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전남도에 따르면 호남의병은 총 3천306명으로, 도내 의병 추모시설은 사당·기념관·동상 등의 형태로 총 187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 시설들을 문중이나 개인이 관리한다고 하니, 이제부터는 지자체에서 이런 시설을 관리하여, 후세 교육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연구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회의는 ‘황병학 의사 기념사업회’에서 협찬해 주었습니다. 황병학 의사님의 장손 황호부 선생님과 손자 황성민 대표에게 감사드립니다. 학술회의 사회는 인천대 이재석 교수님이 맡겠습니다. 이 교수님은 인천대 행정대학원장, 사회대학장,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발표와 토론을 해 줄 분들에 대한 소개는 사회자가 할 것입니다.

오늘 바쁘신 중에도 이 자리에 참석하시어 성황을 이루어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들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 <전남 청소년 역사탐구대회>
광양출신 의병장 ‘황병학’백운산을 붉게 물들이다.

한국항만물류고등학교 1학년 김수빈, 이민승, 조하늘, 조하정

☜차 례☞

1. 주제 선정 동기 및 목적……………………………………………… 1

2. 자료수집 기간……………………………………………………………1

3. 자료수집 과정……………………………………………………………1

4. 한말 항일의병운동과 의병장 황병학의 활동 ………………………2
1) 한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 2
2) 의병장 황병학의 활동과 백운산………………………………… 3
3) 백운산 생쇠골에서 무기제작 …………………………………… 5
4) 광양군 망덕면 ․ 옥곡원 전투 ․ 광양 헌병분견소 습격 ……… 6
5) 국권회복을 위한 새로운 방도 모색…………………………… 8
6) 군자금 모집활동 후 만주로 망명………………………………… 9
7)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 입국 중 피체………………………… 9

5. 소감문………………………………………………………………… 10

※ 황병학 의병장 일대기………………………………………………--11

1. 주제 선정 동기 및 목적
황병학 의병장은 한말에 광양시 진상면에서 태어나 생활하며 백운산의 깊은 골짜기와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항일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을 하였던 분이시다. 하지만 이 지역출신조차 의외로 그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광양 진상면 출신 독립 운동가이신 황병학 의병장의 위대한 삶도 기억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에 동참하고자 하여 역사탐구대회 주제로 선정하게 되었다.

2. 자료수집 기간

2015 7. 17 ~ 2015. 9. 14

3. 자료수집 과정

우리는 주제를 선정한 이후 가장 먼저 광양 시립도서관과 광양문화원을 방문하여 황병학 의병장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기대와는 달리 별다른 자료를 얻지 못하여 광양 읍사무소를 들려서 자료를 문의했지만 아쉽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진상면사무소 홍보과에 황병학 의병장의 업적을 정리해 놓은 자료가 있었다. 담당자께서 우리에게 그의 업적, 생애를 친절하게 설명해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자료수집 과정에서 드문드문 부족한 부분은 인터넷 자료를 검색하였으며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후에는 친구들과 함께 출생지인 진상면 비촌마을과 전투지인 망덕포구 그리고 무기 조달지였으며 근거지였던 백운산일대로 현장답사를 다녀왔다.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황병학 의병장은 광양지역에서 일제에 항거하여 무장투쟁을 하였지만 그 전과에 비해 체계화된 자료나 홍보가 안 되고 있다는 점이 정말 아쉬웠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업적을 조사하고 발굴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다는 희망에 포기하지 않고 그의 업적을 알아내 갔다.


4. 한말 항일의병운동과 의병장 황병학의 활동

1) 한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시작된 항일의병투쟁은 제천의 유인석과 춘천의 이소응 등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유생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호방지방에서도 단발령에 반발하여 장성을 중심으로 한 유생들의 의병과 나주를 중심으로 한 아전들의 의병이 일어났으나 관군 및 일본군과 싸움 한 번 갖지 못하고 해산 당했다. 그러나 동학농민항쟁으로 엄청난 살육과 약탈이 자행된 지 1년여 만에 다시 봉기하여 민족의 분노를 터뜨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05년 11월 일제 침략자들은 을사조약을 강요해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조선을 그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망국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제의 침략에 항쟁하였다. 특히 최익현의 봉기는 을사늑약 체결이후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는데 봉기 당시 최익현 등이 전남 11개군에 발송한 격문과 태인, 정읍, 순창 방면 등으로의 행군은 호남의 의병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로 호남 각지에서는 유생들이 중심이 된 의병 봉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1906년 11월 백낙구가 고광순, 이광선 등과 구례에서 의병을 일으켜 광양을 점령한 후 구례와 순천을 공격하다가 패퇴하였으며, 담양에서는 고광순이 창평에서 봉기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최익현 이후에도 호남 각지에서 의병 봉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을사늑약 이후로 의병운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한성과 지방의 일부 군인들이 의병부대에 합류하였으며, 이때부터 의병 투쟁은 유생과 농민을 비롯해 군인과 상인 등 각계각층이 참여한 의병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이때부터 의병은 전국에 흩어져 게릴라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각 지방의 의병은 지리적 이점과 민간인들의 협조로 일제침략자와 그들의 앞잡이들을 응징하면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유생 의병장들은 의병연합부대(13도 창의군)를 결성되어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면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패퇴하였다. 이후에도 의병들은 소규모 부대로 나뉘어 끈질긴 투쟁을 벌여 나갔다. 특히 호남 일대의 의병이 가장 활발하였는데, 함평에서 봉기하여 ‘전남 제일’의 의병장이라 부른 심남일, 보성에서 봉기한 평민 의병장 안규홍, 바다와 산을 누비던 의병장인 전해산 등은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1909년)으로 체포될 때까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면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끝까지 저항하였다. 일제의 남한대토벌 작전이란 가장 강력한 항일 세력인 호남 의병을 향해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한 것으로, 진압과정에서 민가에 대한 방화와 살육 등 온갖 잔혹한 수법을 다 동원하였다.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150여 회에 걸친 토벌을 통하여 이 기간 동안 의병이 입은 피해는 사망 756명, 부상 수백 명, 포로 700여 명에 이르렀다.

2) 의병장 황병학의 활동과 백운산
황병학 의병장은 전남 광양군 진상면 비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는 조선이 일제의 압력으로 치외법권과 무관세 무역 등을 인정하는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고 개항을 한해이기도 하다.

남한대토벌 작전 때 체포된 호남 지역 의병 모습
어린 시절부터 골상이 굵직하고 눈에 광채가 있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범상

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어려서부터 서당과 향교에서 한학을 배웠는데, 그 총명함이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총과 화살을 둘러메고 백운산 정상을 오르내리면서 사냥을 즐기는 활달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특히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여 동네 사람들이 이르기를 어른이 되면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동량지재가 됨에 충분하다고 입을 모으기도 하였다고 한다. 의병장의 전 생애를 보면 이 같은 기대는 조금도 그릇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황병학은 광양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백낙구 의병부대가 구례와 순천을 공격하다가 패진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종숙인 황순모, 구례의 한규순, 백학선 등과 힘을 합해 백운산을 의병의 근거지로 삼았다.
백운산의 깊은 골짜기와 험준한 산세는 의병의 유격투쟁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었다. 더욱이 백운산은 남서쪽으로는 조계산, 북동쪽으로는 지리산으로 연결되며, 섬진강과 광양만을 통해 해상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는 등 지리적 조건이 갖추어진 장소였다.
드디어 1908년 음력 7월 하순, 백운산 먹뱅이(墨栢)에 모인 약 200명 내외의 의병들은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라고 맹세했다. 이 자리에서 지략과 담력이 뛰어난 황병학은 32세의 나이로 의병장에 추대되었고, 종숙인 황순모는 선봉장을 맡았다.

백운산 억불봉 전경
당시 항병학 의병부대에 참여한 것으로 확인되는 인물은 진상면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황병학 의병부대는 청장년층으로 구성되었으며, 지역적으로는 광양을 비롯한 전남 동부 및 경남 서부 지역의 주민들이었다.
황병학 의병장과 생사를 같이 하고자 각처에서 모여든 의병이 200여 명을 훨씬 넘었는데, 그 대부분은 산포수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날마다 산을 타고 넘으면서 짐승을 잡아온 사냥꾼들이라 산악지리에 밝을 뿐만 아니라 사격술도 능해 일당백의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의병 구성원의 특성이 이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3) 백운산 생쇠골에서 무기제작

백운산 야철로(冶鐵路) 위치도
의병장 황병학은 백운산 먹뱅이 계곡의 임방골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인근의 부호로부터 군량과 군자금을 지원받았다. 또한 의병의 취약점인 화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백운산과 지리산에서 활동하는 산포수들을 불러 모아 무기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무기를 제작하기 위한 야철로가 백운산 억불봉 아래의 생쇠골에 만들어졌다. 당시 광양지역의 의병들은 철광석을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생쇠골 바로 아래 평촌마을에 농기구와 솥 등을 만들던 철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을 전후 시기에 제청한 흔적으로서 황병학 의병부대의 무기제작과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도 진상면 내회마을의 계곡에도 노점골이 있는데, 이곳에도 의병의 무기제작과 관련된 유적이 산재되어 있다. 이처럼 황병학 의병부대는 억불봉 아래 생쇠골을 비롯한 여러 곳에 야철로를 확보하고서 무기를 자체적으로 제작하여 조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4) 광양군 망덕포구 · 옥곡원 전투 · 광양 헌병분견소 습격
황병학 의병장의 부대가 최초로 일본군과 접전한 것은 1908년 8월 5일 광양군 진월면 망덕만 전투이다. 황병학 의병장은 망덕포구에 일본 선박 1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사격과 수영에 능한 의병 150여 명을 뽑아 특공대를 편성하였다. 그리하여 의병부대는 백운산 본진에서 야간행군을 하여 일본 선박이 정박해 있던 망덕포구 근처의 미리 정해둔 집결지에 도착한 뒤, 80여 명으로 제1대를 편성하여 왜선을 기습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리하여 제1대는 10여척의 일본 선박을 기습 공격하여 잠에 취해 있던 일본인 다수를 사살하고 수척의 선박을 침몰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나머지 병력으로 제2대를 편성하여 망덕만 부근의 일본인 주거지를 습격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제2대는 10여 채의 일본인 집을 습격하여 파괴·소각하면서 4명의 일본인을 사살하고, 이들이 가지고 있던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의 상황을 일본측은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08) 9월1일 오전 3시 비도 50명(양총 3 · 화승총 25)이 광양군 진하면 망덕리에 내습, 일인 어부 오까야마현 사람 가꾸노와 그의 처 이소 및 장남 아끼라를 총살하고 가옥을 불사른 다음 이 마을의 잡화상 고오지현 사람 이시다 집에 내습, 고용인 다까하시를 바다에 던져 익사케 하고 또 해안에 매어둔 일본어선을 불살랐다.
망덕포구 전투에 대한 일본역사서 ⌜전남폭도사⌟

일본군과의 첫 접전에서 승리한 후 의병부대는 사기충천하여 백운산 본진에서 전투력 강화 훈련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같은 해 9월 초순경 황병학 의병장은 순천에 주둔한 일본군 헌병 분대 병력과 새로이 설치된 광양 헌병분견소 병력이 합동작전으로 망덕만 전투에서의 참패를 보복하기 위해 백운산 의병 주둔지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리하여 100여 명의 정예 의병을 특공대로 편성하여 광양군 옥곡면 옥곡원 뒷산 골짜기에 매복시킨 뒤, 일본 헌병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곧 그들이 나타나자 기습 공격을 단행하여 우왕좌왕하는 적들을 다수 사살하여 퇴각시켰다. 이 때 황병학 의병장은 전투를 지휘하다가 불행하게도 왼쪽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은 지금 당황하고 있다. 전투 대열을 갖추기 전에 쳐 부셔야 한다. 기운을 내라”고 의병들을 독려하여 결국 승전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후 황병학 의병장은 평소 교분이 두터웠던 최춘명의 집에서 한 달여 상처를 치료한 후 다시 백운산 의병부대로 되돌아가 다음 전투에 대비하였다. 특히 이듬해 1월은 예년에 비해 혹독한 추위가 계속되자, 기상의 악조건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일본군이 백운산 아래에 진을 치고 의병의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주력하여 광양 헌병분견소 본대에는 몇 명의 경비병밖에 남아 있지 않은 사실을 인지하였다. 그리하여 광양 헌병 분견소 본대를 공격하기로 작정하고, 백운산 지리에 어두운 일본군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두 개의 이동경로를 설정하여 하나는 공격로, 다른 하나는 철수로로 이동하도록 계획하였다. 그런 뒤 50여 명의 정예 의병으로 특공조를 편성하여 1909년 1월 23일 야밤을 이용하여 광양 헌병분견소 근처까지 이동하였다. 그리고는 적들이 졸음에 빠져있는 시간에 은밀히 잠입하여 전혀 총을 사용하지 않고 일본 헌병들을 전원 포박한 다음, 무기고에서 10여 정의 총기를 노획하여 무사히 귀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후 이로 인해 일본군의 감시와 탄압이 가중되어 전투 활동은 물론 의병 근거지인 백운산 식량을 조달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이에 황병학 의병장은 의병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은 스스로 피신하도록 보내주고, 나머지는 전라남도 여천군 삼일면 앞바다에 있는 묘도로 이동하여 그곳을 의병활동의 거점으로 삼고 재기를 도모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의병들을 하산시켜 각자의 뜻에 따라 피신하거나 새로운 의병활동의 거점으로 결정된 묘도로 가도록 하였다.

5) 국권회복을 위한 새로운 방도 모색
황병학 의병장은 1909년 7월 19일 동지들과 함께 광양읍 황금동 나루터에서 배를 구하여 묘도로 향하였다. 그러나 거의 도착할 무렵 일본군에게 의병부대의 묘도이동 계획이 탐지되어 집중 사격을 받고, 100여 명의 의병 가운데 절반 이상이 피살되는 희생을 당하였다. 이 때 황병학 의병장은 배에서 뛰어내려 잠영(潛泳)으로 여천군 삼일면 군장동 부근에 상륙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의병조직은 완전히 와해되었을 뿐만 아니라 곧 이어 같은 해 9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 일제의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이 전개됨에 따라 재기 또한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친지들의 집을 찾아 이리저리 피신하면서 국권회복의 새로운 방도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을사 5적 가운데 하나인 이근택을 저격하였던 기산도를 1918년 비밀리에 만나 독립운동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신한청년당에서 국내에 파견한 독립운동 밀사인 김철을 만나, 그의 권유로 임시정부 국민대회 전라남·북도 의무금 모집단을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김철·기산도·김종택·이인행·박은용·김영탁·민치환·이문복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기 지방 자산가들을 찾아다니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황병학 의병부대의 주요 이동 경로

6) 군자금 모집활동 후 만주로 망명
그러나 그 해 10월 동지 가운데 한 사람인 김종택이 자금을 모집하다가 종로경찰서에 피체되어 조직이 탄로 나고 말았다. 때문에 기산도·이인행 등 다른 동지들 또한 잇따라 피체되자 황병학 의병장은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국외 망명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상해 임시정부 교통차장으로 활동하던 김철의 도움으로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일제의 사슬로부터 벗어났지만 임시정부 국민대회 전라남·북도 의무금 모집단 사건으로 결석재판을 통해 1920년 7월 19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7)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 입국 중 피체
약 4년 동안 황병학 의병장은 만주에 망명한 애국지사들과 함께 영고탑·용정, 그리고 흑룡강과 흥개빈 등지에서 독립투쟁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23년 봄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라는 비밀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던 중 의주에서 일본 헌병대에 피체되어 평양형무소에서 4년여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1927년 봄 출옥하여 귀향하였다.
이후에도 조국 광복에 헌신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여 재차 만주로 망명하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의병전쟁 중에 입은 총상의 악화, 일경에 당한 고문의 후유증, 그리고 4년여에 걸친 옥고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1년 4월 23일 55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5. 소감문
바쁘게 돌아가는 빡빡한 학교 일정 속에서 틈틈이 시간을 내 역사 탐구대회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처음에는 우리의 의욕만 앞서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점차 나아갈 방향이 정해지고 지식이 늘어갔다. 이번 조사 활동을 통해 우리는 광양출신으로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한 황병학 의병장의 업적을 알게 됨으로써 지금 우리가 있을 수 있기까지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깨닫고 감사함을 느꼈다.
특히 한말 항일의병운동사에서 호남지역의 의병들의 활약이 대단하였음을 보고 자부심도 생겼다. 1908년이후 일제의 강력한 탄압아래 다른 지역의 의병운동이 쇠퇴하거나 또는 침체국면으로 전환된 상황임에도 가장 유일하게 끝까지 싸운 사람들은 호남지역 의병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남지역 의병장중 한명인 진상면 출신 ‘황병학 ’에 대해 우리들이 보고서를 작성하고 현장답사를 진행하면서 새롭게 알게 되서 정말 기쁘다.
황병학 의병장이 지역 주민을 모아 왜적을 무찌르며 발휘한 리더십은 대단한 것 같다. 사람을 통솔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먼저 나서서 용기 있게 이끌었던 의지가 정말 존경스럽다. 더군다나 한 지역에서 그치지 않고 광양에서부터 만주에까지 이르는 넓은 활동범위는 그의 강한 애국심과 역량을 여실히 입증해 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백운산 야철로에서 무기를 직접 제작해서 사용했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웠다.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의 놀라운 열정과 헌신이 존경스럽고 멋있었다. 답사과정에서 옛날 황병학 의병장이 실제 거주했던 비촌 마을 생가가 현재는 모두 수몰되어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 컸다. 그리고 백운산에 힘겹게 올라 야철로를 직접 본 것도 정말 인상적이었고 참신한 역사 현장 답사 경험이었다.
우리들은 이번 기회를 통해 황병학 의병장에 대한 자료를 찾고 검색해가면서 포기하지 않고 서로 의논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어 참 기쁘다. 우리가 함께 한마음으로 참여할 때 그 마음도 애틋해짐을 알게 되었다.
짧은 기간의 활동이었지만 역사 탐구 활동은 보람된 것이었다.


◈ 의병운동의 이념적 특성과 현대적 의의
-황병학 의병 투쟁을 기리면서-
방영준(성신여대윤리교육과명예교수)

Ⅰ. 머리말
필자는 의병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한국근현대사에 의병운동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가 얼마나 공허했을까하는 느낌을 항상 받아 왔다. 일제의 강제병합이라는 국치 110년이 다가오고 있고, 올해는 삼일 운동의 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강제병합의 과정 중에서 만약 의병운동이 없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운 민족이 되었을까? 그래도 의병운동이 있었기에 국치의 부끄러움을 어느 정도 위안 받지 않았을까하는 느낌이다. 또한 그 의병정신이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뿌리가 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사적 초석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의병 운동과 의병 정신은 화석화되어 박물관의 낡은 골동품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 필자는 박물관의 골동품 취급을 당하는 의병을 시장에 내 놓고 그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의병 정신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 공동체에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해 탐구해 보고자 한다. 필자가 ‘황병학 의병’의 집필 의뢰를 받아 드린 것은 의병운동을 가치론적인 측면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탐구를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황병학 의병장에 관한 자료를 읽으면서 의병의 이념과 현재적 의미를 탐구하는데 있어 황병학 의병투쟁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하였다. 이 글은 황병학 의병운동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오늘의 한국사회에 어떻게 되새김할 것이냐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 글은 흔히 말하는 ‘학술적 논문 형식’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글쓰기로 필자의 생각을 전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학술적 논문 형식은 의병 운동을 시장에 내 놓는 포장으로는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순서는 먼저 한말 의병 투쟁의 개관과 황병학 의병의 위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음 의병운동을 낡은 것으로 보는 등 의병운동에 대한 잘못된 견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이것은 의병을 박물관의 진열대에서 빼내오기 위해서 해야 할 첫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의병운동에 나타난 이념적 특징을 탐구해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시민사회와 세계화 시대의 와중에 있는 우리 한국 사회에서 의병 정신이 의미하는 바와 그 역할을 탐색하고 재조명하고자 한다.

Ⅱ. 항일 의병투쟁의 개관과 황병학 의병의 위치

일제 침략에 저항하는 항일 의병투쟁은 일반적으로 네 단계로 나누어진다. 즉, 초기 단계, 재기 단계, 고조 단계, 퇴조·전환단계이다.
초기 단계의 의병운동은 민비를 살해한 을미사변과 친일 내각이 강행한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난 ‘을미의병운동’이다. 그 지도부는 유인석,기우만 등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양반 유생이었고 그 구성원은 일반 농민과 동학 농민의 잔여 세력이었다. 국모의 살해에 대한 복수 의식과 단발을 야만시하는 반개화의식이 함께 하여 일어난 무장 투쟁이었다. 을미 의병은 친일 관리들과 조선 군경을 대상으로 투쟁하였고, 아관파천으로 친일 내각이 붕괴된 후 대부분 해산되었다. 일부는 활빈당과 화적으로 변했다.
재기 단계의 의병운동은 1904년 러일 전쟁과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다시 일어난 ‘을사의병운동’을 말한다. 을사의병은 을사조약 반대와 친일 내각 타도를 목표로 하여 국권회복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 시기에도 민종식, 최익현 등 양반 유생이 의병의 지도부를 형성했으나 신돌석 등 평민 의병장이 등장했으며, 전투 형태도 수성전에서 유격전 형태로 변화되어갔다.
고조단계의 의병운동은 고종의 강제 퇴위,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뒤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맺은 정미 7조약,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일어난 가장 치열한 ‘정미의병운동’이다. 군대 해산 당일 시위대 소속 군인 1600여 명이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고, 그 저항운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해산 군인의 합류로 의병 부대는 우수한 지휘관과 새로운 무기를 확보하게 되었다. 동시에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의병부대의 연합작전이 활발하게 되어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는 13도 의병이 서울 진공작전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 때 평민 의병장의 수가 양반 의병장의 수를 능가했고 일제의 군경이 직접적인 교전의 상대로 의병운동은 ‘국권방위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퇴조·전환 단계의 의병운동은 일본군의 소위 ‘남한대토벌’과 일본의 한국 병합을 계기로 의병세력이 퇴조하여 독립군으로 전환되어 간 ‘합방’전후의 의병을 말한다. 1909년 9월과 10월, 일본군의 남한지역에 대한 잔인한 진압 작전으로 큰 타격을 입은 의병은 대거 만주지역으로 옮겨 갔으며,잔여 세력은 산악지대에 분산되어 투쟁을 계속했다. 만주 지역에 옮겨 간 의병 세력은 애국계몽세력과 제휴하여 근대적 독립군 부대로 재편성되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황병학 의병운동은 전환·쇠퇴기의 의병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그 만큼 황병학 의병은 어느 의병보다 많은 고통과 곡절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끝에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는 격문을 붙이고 산포수 등 250여명의 장정들이 호응하여 1908년 7월26일(음) 광양의 백운산에 ‘호남창의대장기’를 꽂고 의병투쟁을 선고하였다. 광양군 진하면 망덕포의 일본 어업자본가들을 공격한 제 1차 전투에서 묘도해상전의 4차 전투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바로 형극의 길이었다.
1909년 전반기에 접어들면서 지방별로 본 의병전쟁의 양상이 일변하였다. 이 시기 전국적인 전투횟수가 1737건인데, 전라남도가 31.5%를 차지하는 547건, 전라북도가 15.8%를 차지하는 273건, 양자를 합치면 47.3%를 차지하는 820건이다. 뿐만 아니라 전투에 참가한 의병수로 보더라도 전라남도가 45.6%를 차지하는 17,759명, 전라북도가 14.5%를 차지하는 5,576명, 양자를 합치면 전국적인 참가 의병수의 60.1%가 되는 전라남북도에 집중하고 있다. 전라남도를 진원지로 하는 의병활동은 직접 전라북도에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상의병투쟁으로 파급되었고 제주도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렇게 1909년 전반기에 접어들면서 다른 지역에서는 겨우 산발적이며 소규모적인 저항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전라남도와 그 외곽지역에서는 날이 갈수록 의병의 기세가 왕성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군중과 의병이 일체가 되어 서로 변신하면서 전 지역을 뒤덮게 되었다. 또한 의병부대의 행동방식은 백주에 공공연하게 지방의 중심지에 들어가 정찰하고, 적의 허점이 있으면 기습하는 전형적인 게릴라 전술이다.이러한 행동방식은 의병과 군중이 일체가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전술이 아닐 수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황병학 의병군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9년 9월1일부터 ‘남한대토벌작전’이라는 이름으로 호남지역에 대한 의병 탄압작전을 본격화한 것이다. 이 토벌 작전의 목적은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경제 참락의 루트를 확보하는 것이다. 당시 일본에 대한 한국의 가장 많은 수출품이 쌀이었고, 한국에 대한 민간자본이 가장 매력적인 투자 대상도 곡창지대의 토지였다. 그런데 의병의 투쟁에 의해 일본 세력이 뿌리내릴 수 없고 또한 해상 의병들의 활동에 의하여 쌀을 반출할 수 없게 되는 위험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명예회복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남도는 이 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의 근거지였으며, 육상에서의 의병 투쟁에 의하여 일본 육군도 이 지역에는 침입을 못했다. 따라서 이 기회에 일본군의 위력을 보여줌으로써 일본 역사상의 치욕을 명예회복을 하자는 것이다.
그들의 작전계획에 의하면 그 범위는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그 외곽에 해당하는 전라북도 남부와 경상남도 동부를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 임시 파견대 2개 연대와 헌병, 경찰을 투입하고, 해상에는 수뢰정 4척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작전 기간은 9월 1일부터 40일로 책정하여 세 단계로 나누고 있다. 2개월에 걸치는 작전기간 중에서 103명의 의병장과 4138명의 의병들이 체포, 피살, 자수하였다. ‘남한대토벌’의 결과 한국합방의 마지막 걸림돌이었던 전라남도의 의병활동은 1909년 말까지 사실상 마무리되고 일제의 경제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본군 측의 기록에 의하면 그 결과를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군의 의병 토벌은 매우 치밀하고 잔혹했고 교활했다. 황병학 의병부대의 선봉장인 황순모 의병의 애달픈 비극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일본군이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과 마을을 태우고 귀순하지 않으면 가족들을 협박하는 상황에서 황순모 선봉장은 하산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순모 선봉장은 일본에 협조하고 다른 의병의 소재를 밝히라고 회유하고 고문했으나 끝까지 거부하고 총살을 택한다. 이 총살 현장에서 같은 의병 활동을 한 한규순이 “의사라면 그만이지 장졸의 구분이 어디 있으려. 나도 같이 죽여라”하면서 황순모 선봉장을 끌어안으면서 일본군의 총탄에 목숨을 함께 했다. 참으로 가슴 아프고 동시에 감격스러운 장면이다.
황병학 의병운동은 남한대토벌작전의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치열하게 전개했다. 황병학 의병장은 해산을 거부하는 의병들을 이끌고 여수의 묘도로 잠적하여 재기를 도모했으나 일본 군경에 발각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많은 의병이 희생되었고 해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그러나 황병학은 불사조처럼 체포되지 않고 피신하다가 3.1일 운동을 계기로 다시 독립운동에 나선다. 고흥에 은거중인 기산도와 함께 ‘임시정부 국민대회 특파위원’의 자격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러 다녔다. 기산도와 함께 임시 정부에 가려고 했으나 기산도는 체포되고 황병도 의사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황병학 의사는 1923년 봄 임시정부의 특명을 띠고 국내에 잠입하려다 신의주에서 체포당하고 만다. 그는 평양형무소에서 4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고향인 비촌으로 돌아왔다. 모진 취조와 고문으로 쇠약해진 그는 1931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황병학 의병장의 생애와 그 발자취는 한국 의병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위대한 서사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의병 투쟁에 대한 인식의 문제
10여 년 전의 일이다. 의병 운동에 큰 애정을 가지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의병정신선양회’의 회장을 맞고 있는 윤우 선생과 대화할 기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윤우 선생은 ‘의병 정신을 낡은 사상’으로 보는 젊은이의 시각에 대해 걱정을 하면서 나에게 원고 청탁을 하였다. 그 때 필자 자신도 의병 정신을 낡은 사상으로 보고 있는 면이 있지 않았나 하는 자책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의병 운동의 현대적 조명을 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의병정신을 낡은 사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한 반론부터 제기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 눈에 번쩍 뜨이는 기사를 발견하였다. ‘조선왕실의궤’ 반환 운동을 주도해온 혜문스님은 2010년 8월 10일 나오토 일본 총리의 반환 약속을 하는 담화를 하자 이를 ‘의병의 승리’라 표현하였다. 여기에 혜명스님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한국일보,2010,8,16)
- 이번 반환 운동을 의병운동에 비유하신 적이 있는데 -
“ 우리나라를 의병의 나라라고 하잖아요. 이번에도 정부는 끝까지 의궤반환을 공식 요청하지 않았어요. 정부가 포기한 실록과 의궤를 국민들이 의병을 조직해서 일본 정부와 협상을 해서 가져오는 것이니까 의병의 전통에 속하는 것이죠”
이외에도 ‘인문학의 의병운동’이라는 기사도 보았다. 이것은 대학사회에서 고사해 가고 있는 인문학을 대학 밖의 여러 모임을 통해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고 서로 공유하려는 자발적 운동을 스스로 인문학의 의병 운동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사를 읽으면서 의병을 새롭게 조명하는 것이 매우 뜻 깊은 일이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황병학 의병운동에 대한 집필을 의뢰받고 자료를 검도하는 중 매우 희망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난 2015년 9월 19 제 5회 전남 청소년 역사탐구대회에서 광양에 있는 ‘항만물류고교’팀이 황병학 의병장의 활동이 일어났던 광양 광덕만, 옥곡원 전투, 광양 헌병분견소 습격 장소 등을 직접 현장 탑사하고 자료조사를 통해 황병학 의병장의 뜻을 기리는 발표를 하여 대상을 수상하였다는 소식이다. 의병 정신을 고등학교 학생들이 그 의미를 펼친 것이다.
그러면 왜 의병을 낡은 사상으로 보게 되는 경향은 왜 생겼을까? 이를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 보고자 한다.

1. 복고적이고 반개혁적 사상이다
의병 정신에 대한 곡해중 제일 큰 것이 복고적이고, 반개혁적이라는 것이다. 의병 운동은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한 완고한 사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식민사관에 젖은 오랫동안의 우리 역사교육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근대화의 이념을 선으로 보고 의병을 평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정신의 전개 속에서 나타난 모든 사상과 이론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연구될 수 있다. 즉 내부 관찰법과 외부 관찰법이다. 내부 관찰법에 있어 연구자의 관심은 해당 사상이나 이론 자체의 내용이다. 이에 비해 외부 관찰법에 있어 연구자의 관심의 초점은 사상이나 이론의 내용이 아니라, 그러한 사상이나 이론이 배태되고 인식되어진 폭넓은 배경들과 그 관계에 있다.
즉 내부 관찰법은 사상과 이론을 전적으로 그 형식과 내용의 의미 자체 속에서만 분석하는 것이고, 외부 관찰법은 사상과 이론이 지닌 형식과 내용을 넘어 다양한 사회적 맥락에 위치시킴으로서 주위 배경의 결정력에 영향 받는 방식으로 그것을 상대화 시키는 것이다.
필자는 의병을 반개혁적이라고 보는 시각의 발단은 지금의 시각에서 내부 관찰법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제 1차 의병운동을 제일 큰 원인이 된 단발령을 예로 들어 보자. ‘단발의 문제’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고 문화의 문제이다. 해방 이후 30여 년 동안 우리의 중고등 남학생은 거의 ‘까까머리’였다. 지금 그들을 까까머리로 만든다면 엄청난 저항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말에 강제적인 단발령에 저항한 것은 단순히 상투 없어지는 것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침략국 일본에 대한 저항이고 민족정체성, 문화정체성에 대한 애정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수없이 찾을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개항 이후 오늘날까지 근대화라는 이념의 틀을 선의 가치로 무의식중에 받아 드리고 있다. 그래서 개화사상은 근대, 위정척사사상은 반근대라는 이분법적 사유로 가름하는 것에 익숙하여 졌고, 또한 그렇게 교육을 받아 왔다. 근대와 반근대화의 문제는 책 한권을 써도 모자랄 많은 논쟁이 있는 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단순화시키고 의병운동을 복고적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의병 운동의 후기에는 의정척사론에서 점점 자유스로워 지는 경향이 나타났으나 이는 무시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구한말의 유명한 의병장 허위에 대한 언급을 하고자 한다. 허위는 위정척사 계통의 유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1904년에 국왕에게 제출한 10 개 조목의 개혁안은 어떤 개혁파보다 못지않은 사회개혁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1908년 12월에 일본의 회유를 물리치고 교수대에 올라 순국하였다.

2. 조선 왕조의 수호에 집중했다
필자는 구한말의 역사를 읽으면 침통하고 짜증스러움을 느낀다. 이때 새로운 기운을 뿜는 개국이 있었으면 생각도 하게 된다. 필자뿐 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도 그러하리라 생각된다. 19세기 중엽 이후 겪은 우리 민족의 시련은 19세기 이전에 겪었던 외세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즉, 우리 선조들이 이제까지 직면했던 외세와는 성격이 다른 근대화된 외세 세력들과의 만남에서 나오는 시련이었다. 결국 그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고 나라를 빼앗기고 만다.
한말에서 국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 지도층은 외세의 농간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국정의 문란은 극심하고 특히 지방의 폐정은 날이 갈수록 심각하고, 동학을 비롯한 각 종 저항운동이 일어난다. 이와 함께 왕권에 대한 민족적, 사회적 기반도 거의 상실된 상태였다.
의병운동은 이러한 한심한 왕조의 수호에 가담했다는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민주주의 사상에 익숙한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것은 위정척사론을 내부 관찰법으로만 보고 이를 의병 운동과 연결시킬 때 이러한 오해는 언뜻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오해는 의병으로서는 매우 억울한 것이라 생각한다. 지식사회학에서 강조하듯 모든 사유는 존재의 구속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말의 개화사상이든 위정척사 사상이든 그것은 결코 서구적 의미에서의 시민사회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근대화된 외부 세력에 대한 나름대로의 반응이었다. 개화사상이 조선 왕조와 왕권을 부인한 적은 결코 없었다. 조선 왕조를 부인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립하고자 하는 의식은 그 어느 집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농민이 중심이 된 동학운동도 조선 왕조의 수호를 포기하지 않는다.
당시의 조선 왕조는 싫든 좋든 ‘우리의 나라’일 뿐이다. 개화파는 그 나라를 근대화시키는데 많은 관심을 두었고 위정척사파와 의병운동은 나라를 지키는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민주적 시민문화가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당시의 조선 왕조를 제외하고 그 어떤 나라를 상상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라를 일본으로 바꾸는 일 외에. 그러나 불행히도 그 나라가 일본이 되는 치욕을 당하고 만다.
의병 정신이 상해임시 정부 수립의 뿌리가 되었고 많은 의병들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새로운 자주 정의국가의 건설을 갈망한 것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황병학 의병장이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한 연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3. 양반 유림 계층이 주도했다
의병 운동을 낡은 사상으로 보는 시각에서 많은 부분은 양반 유림 계층이 주도했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민중적, 민초적 시각에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오늘날 일반이 가지고 있는 유림에 대한 인상은 매우 완고한 상으로 그리고 있고, 조선조 양반에 대한 시선 또한 결코 곱지 않다. 자기 스스로를 양반 계급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엄청 많음에도 불구하고.
의병 운동의 초기에는 분명 양반 유림 계층이 주도했다. 그러나 양반 유림 계층이 의병 운동의 출발점에 서 있지 않았다면 필자는 매우 절망적인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국가에서 엘리트 계층인 양반 유림 계층이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면 얼마나 허무할 것인가. 또한 나라를 팔아먹은 주인공이 양반 계층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국가나 사회의 운영에 있어 엘리트의 역할과 그 비중의 막대함에 많은 지면을 할애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세계의 사회 운동사를 보면 민중 지향적 성격을 지닌 운동도 거의 그 시대의 엘리트 계층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맑스나 레닌도 그 시대의 엘리트 계층이라 할 수 있다. 민중이 실체냐 상징체계냐 하는 논쟁은 많다. 필자는 민중은 실체라기보다는 어떤 지향성 같은 상징체계로 보고자한다. 필자는 민중을 상징체계로 보면서 의병 운동은 민중에 바탕을 둔 구국의 의용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기, 후기 의병운동으로 진행되면서 의병의 참여자도 매우 다양해지고 의병의 지도자도 다양한 계층에서 나온다. 초창기 의병 운동이 양반 유림 계층에서 주도되었다는 것은 사회 운동사의 측면에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며, 나아가 의병 운동이 진행되면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고 또한 주도되었다는 사실은 의병 투쟁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Ⅸ. 의병 운동의 이념적 특징
의병 투쟁의 정체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병 운동의 이념적 특징이 무엇인지 도출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부정의에 대한 저항, 민족 정체성과 문화 정체성 정립, 세 가지 측면에서 이념적 특징을 찾아보고자 한다.

1. 부정의에 대한 저항
의병 정신의 제일 큰 이념적 특징은 ‘부정의에 대한 저항’으로 본다. 그러면 정의는 과연 무엇인가? 정의라는 용어는 인간의 행동원리에서부터 정치적 사회질서에 이르기까지 매우 포괄적이고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정의에 대한 개념도 사상가에 따라 다양하고, 또한 동서양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개개의 정의관이 지니는 다양성과 합의 불가능성 때문에 어윈(R. Erwin)같은 학자는 정의를 찾기 위해서는 ‘정의의 부재’를 보는 편이 낫다고 보고, 모든 부정의의 상태를 제거하는 것이 곧 정의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문으로 된 많은 고전 가운데 정의라는 단어는 많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몇몇 문헌에 나타난 용례로 볼 때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첫째, ''올바른 의미’(correct meaning)로서의 정의
둘째, ‘행위의 정당성’(legitimacy or rightfulness)으로서의 정의
셋째, ‘곧고 의로운 인격’(straightforwardness or righteousness)으로서의 정의

위의 세 가지 내용을 통합해 보면 ‘옮고 바른 사유와 행동의 총체’로서 정의를 보는 것이 무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병 운동의 정의관은 ‘배분적 정의’니 ‘절차적 정의’니 하는 서양의 정의관이 아니라 옮고 바른 사유와 행동의 총체로서의 정의관이다.
이러한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 부정의이다. 의병정신의 핵심은 이러한 부정의에 대한 저항에 있다. 이것이 한국 성리학의 의리정신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한국인이 지닌 여러 사유의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는 필자의 능력으로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의병운동에 나타난 부정의에 대한 저항이 세계 사회 운동사에 예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치열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의병 운동은 ‘ 실패가 예고된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실패가 예고된 저항을 계속한다는 것은 참으로 경이롭다 하겠다. 그래서 의병정신은 독립 운동의 초석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일제치하에서 민족의 자주와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은 바로 의병의 부정의에 대한 불굴의 저항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나. 민족 정체성, 문화 정체성의 정립
위정척사사상이나 의병 운동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이 민족 정체성의 훼손과 문화 정체성의 붕괴에 대한 위기감이다. 이것은 일일이 문헌적 자료로 여기서 인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밝혀진 사실이다. 필자는 먼저 한말 시대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근대 이전 한국인은 일본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고, 근대 이후 일본은 근대문명의 선진국을 자부하며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을 지속적으로 고착시켜 나갔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후쿠자와 유기치가 1875년 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인용해 본다.
“ 도대체가 이 나라가 어떠한가를 묻는다면 아시아주의 소야만국으로 그 문명의 정도는 우리 일본에 까마득히 미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나라와 무역하고 통신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전혀 없다. 그 학문이 취할 만한 것이 없고, 그 병력 또한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조선이 스스로 우리의 속국이 된다 하드라도 기뻐할 만한 것이 못된다. ”
위와 같은 사례는 수 없이 많다. 한국인을 도박, 술타령, 게으름, 거짓말, 기만, 음모, 술책, 사대주의 등 온갖 악덕을 소유한 사람으로 묘사한 문헌들이 매우 많다. 한국에 대한 이러한 ‘야만국’인식은 18세기 말부터 각 관공서, 교육기관, 언론, 각 종 출판물을 통하여 무제한적으로 선전되었고, 이것은 구체적으로 구한말에 대한 정책으로 반영되었다. 위정척사론은 이러한 맥락과 관련하여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본 민족의 우월감에 입각한 한국관은 일제 강점 시에는 동화정책과 ‘내지연장주의’를 식민지 지배정책으로 채택하게 된다. 그 구체적인 지배이대올로기가 소위 ‘황민화’와 ‘내선일체’이다. 이러한 한국인을 야만으로 보는 일본인의 인식과 정책에 굴복하여 우리 한민족의 정체성과 문화 정체성을 상실한 부끄러운 사례가 얼마나 많았든가.
우리의 의병 운동은 이러한 일본인의 한국 인식과 논리에 대한 첫 무력 저항운동이다. 우리의 얼과 혼을 빼앗는 일제의 침략에 처절하게 저항한 것이다. 이러한 의병정신은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신채호는 일본제국을 ‘강도 국가’라고 보고 민중혁명에 의한 전면적 투쟁을 주장한 것은 의병 정신의 계승이다.

다. 엘리트 계층의 책무 정신
의병 운동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김호성 교수는 의병운동의 정치적 가치정향을 ‘사림 정치문화’와 ‘위정척사사상’ 및 ‘한국근대 민족주의적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필자가 관심을 두는 것이 ’사림 정치문화’이다.
사림파는 정몽주, 길재에서 출발하여 김자연,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으로 이어지는 도학의 학통이다. 도학은 탐욕적 욕망을 극복하고 의리가 확고한 인간과 정의가 주도하는 사회를 이상으로 추구하고 있다. 사림파는 도학적 정통성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갖고 학문과 도덕적 규범의 실천에 철저한 학풍을 지지고 있었다. 사림파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정암 조광조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감옥에 갇혀서 “ 나라가 병드는 것은 이익을 탐내는 욕망에 있다고 헤아리고, 나라의 맥을 무궁하게 새롭게 하고자 하였을 뿐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사림은 전통적 신분질서에서 그들의 우월한 사회적 가치를 확보하려는 한계상황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통치조직 내부로부터 침식당하는 국가를 유지 회복함으로써 적어도 민중과의 제휴를 전제로 하는 동질적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의병 운동은 이러한 도학의 전통에 바탕을 둔 사림의 정신을 국난의 상황에서 구체적 저항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라 본다. 여기서 필자는 사림의 문화에서 지도층, 엘리트 계층의 엄중한 책무 정신을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선비 정신의 구현이다. 의병 정신의 핵심중의 하나는 바로 지도층, 엘리트 계층의 역할과 의무에 대한 큰 길잡이가 되고 있다.

Ⅹ. 한국사회의 변화와 의병 정신의 재창조
오늘의 한국사회가 처한 상황을 진단하는 용어로 ‘시민사회’와 ‘세계화’라는 단어가 많이 거론되고 있다. 시민 사회에서 시민은 사회의 주인이며 개인적 행복 실현과 사회 발전을 인도할 가치의 창조자이다. 시민의 개념은 동양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은 서양의 사회변화 과정에서 등장된 개념이다. 한국에서의 시민 사회에 대한 관심은 민주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시민사회는 다양성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자율적인 사회로서, 협의와 협동을 중시하고 다수와 소수를 다 같이 존중하면서 공공의 복지를 지향하는 사회이다. 이와 함께 바람직한 시민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시민 윤리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세계화는 다문화란 용어와 함께 오늘날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시민사회, 세계화 시대에 있어 의병 정신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재창조되어야 하느냐가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다.

1. 정의로운 공동체 구현과 엘리트의 자세
필자는 의병 정신의 첫 번째 특징으로 ‘부정의에 대한 저항’을 들었다. 이러한 부정의에 대한 저항 정신은 이제 정의로운 공동체를 구현하는 정신적 길잡이로서 의병 정신이 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정의사회란 어떠한 사회인가를 두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의의 개념만큼이나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왔다. 유교의 ‘대동 사회’, 도가의 ‘소국과민’, 플라톤의 ‘이상국가론’, 맑스의 ‘공산사회’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고, 그 실현에 대한 방법도 그러하다.
정의와 정의 사회에 대한 개념을 규정하고, 그 원칙을 도출하는데 많은 미해결의 상태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의의 실천을 위한 노력이 유보된다는 것은 인간 사회의 현실이 용납하지 않고 있다. 그러기에는 인간이 직관적으로 정의와 부정의에 대해 이미 알고 있고,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부정의로 인한 많은 고통을 받아 왔고, 정의의 실천에 관한 현실적 삶의 절실한 요구를 체감하고 있다.
필자는 정의로운 사회를 ‘옮고 바른 공정한 사회’로 일단 정의하고자 한다. 아마도 이것은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옳지 못하고, 바르지 못하고, 공정치 못한 경우가 너무도 많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제도적 영역에서부터 물질 만능주의, 생명경시 풍조, 연고정실주의, 학벌주의, 지역주의 등 우리의 정신적 창고에도 정의롭지 못한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
또한 정의로운 사회는 공동체적 사회와 함께 한다. 오늘날 근대화와 더불어 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휩쓸고 있다. 동시에 경쟁에서의 승리가 중요한 삶의 덕목으로 등장하면서 우리의 공동체적 삶이 붕괴되고 있다. 오늘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양극화 문제도 이러한 맥락과 함께하고 있다.
정의로운 공동체를 구현하는데서 가장 요구되는 것이 지도층과 엘리트 계층의 도덕심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고귀한 신분에 따른 윤리적 의무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회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의 많은 노블리스들은 국민들에게 ‘죄송’한 대상이 되고 있다. 오죽했으면 우리의 사회 지도층은 사회를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지도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애기도 나오고 있다. 의병 정신에 나타난 보국 정신과 자기희생 정신은 한국 사회에 노블리주 오블리주 정신을 구현하는데 큰 길잡이 역할을 하는 등대이다. 이제 그 등대의 빛이 정의로운 공동체를 구현하는 견인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의병정신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

2. 공생적 민족 정체성과 문화정체성의 정립
의병 정신에 일관되어 나타난 특징이 민족 정체성, 문화정체성에 대한 지향이다. 정체성 개념은 ‘변화 속의 영속성’과 ‘다양성 속의 단일성’이라는 두 요소를 지니고 있다. 정체성의 출발점은 자아 중심성에 있다. 이 자아 중심성의 강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이 나타난다. 그리고 자아 중심성은 타자와의 만남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여러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한말 의병 운동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에서 나온 정체성 정립 운동이다.
오늘은 세계화 다문화 사회로서 타자와의 만남의 광장이 확장되고 있는 사회이다. 그러면 한말의병 정신에 나타난 정체성 정립 과제가 세계화, 다문화 사회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며, 어떻게 이어 가야 하는가? 세계화는 다양화와 획일화라는 두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세계화 사회의 이면에는 문화제국주의적 요소도 많이 있다. 우리는 일찍이 19세기 제국주의적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미국과 서구를 통해 습득된 가치관과 생활 방식으로 살고 있다. 이미 서구의 것이 나의 것이 되었고 전통적인 것이 타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세계화, 다문화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와 함께 민족 정체성과 문화 정체성의 정립이 우리의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민족, 문화 정체성의 확립은 자기에 대한 자긍심에서 출발한다. 자긍심이 없으면 스스로를 천덕꾸러기로 만든다. 자긍심은 자만심과 다르다. 자만심은 상대방을 낮게 보면서 자기를 높이는 유아적이고 폐쇄적인 자세인 반면, 자긍심은 타인과 함께 공생하면서 자신이 설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정체성 확립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민족의 자긍심은 그 민족이 지닌 문화적 전통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의 문화적 전통을 마치 박물관의 골동품을 보는 것처럼 해오지 않았나 하는 느낌도 듭니다. 현재는 과거라는 터전을 통해 마련되는 것이고, 전통문화는 지난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의 일상생활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 다문화 사회에서 성장시킬 자아의식은 자기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타자와 공생할 수 있는 정신적 여백을 내장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아의식을 필자는 ‘공생적 정체성’이라고 표현하고자 한다. 문제는 정체성이 미미하거나 나약할 경우이다. 이럴 경우 우리는 타자에 의해 점령당하는 문화 식민지가 되고 말 것이다. 민족과 문화에 대한 공생적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해서 우리 문화의 전통 속에서 내세울 만한 긍정적인 요소를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열린 태도를 가지면서 문화적 다양성을 인내하는 자세에서 나온다. 이것이 의병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길이다.

3. 시민민족주의와 평화주의의 구현
의병 운동이 한국 근대민족주의의 형성에 있어 제일 큰 뿌리임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세계화, 다문화 시대에서 의병 정신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의 가치를 어떻게 실현시키느냐에 있다. 오늘날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도 지구촌은 민족주의의 성향이 식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분출되고 있다.
민족주의는 유형상으로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즉, ‘인종적 민족주의’와 ‘국민적 민족주의’, 그리고 시민적 민족주의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인종적 민족주의는 혈연적 단일성과 민속적 공통성에 바탕을 둔 것이다. 국민적 민족주의는 인종적 민족주의에 공화주의가 결합되고, 또한 공화주의가 인종보다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이다. 국민적 민족주의는 혈통과 민속을 초월하여 동일 거주지에 살면서 누구나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대접을 받으면서 평등한 법적 지위를 기반으로 하여 민족이 구성된다.
오늘날 국가가 세계회의 관계망 속에 편입되면서 민족국가의 성격도 변해가고 있다. 국가 권력은 국내, 국제적 차원의 다양한 주체에 의해 분할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민족국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존재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민족국가는 국내 정치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단위로서 필요하며, 또한 세계화 과정을 정치적으로 규제하는 주체가 된다. 여기서 ‘시민민족주의’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근대 민족국가체제에서 자아 정체성의 기초가 되었던 민족 정체성은 이제 더 이상 단일한 형태로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개방적이고 성찰적으로 구성된다. 즉, 국가 구성원이 세계 시민성을 가지는 것이다. 시민민족주의의 구성원은 자신의 지방성과 세계 시민성을 동등하게 겸비한 자아를 가진 자이다. 이러한 시민적 민족주의는 다양성 속의 통일이라는 다원주의와 자기 존재감을 가지면서 민족 간의 공존을 지향하는 국제평화주의로 나아간다. 의군참모중장 출신인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주장한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의병 운동에 나타난 민족주의적 가치가 세계화, 다문화 시대에서 나가야 할 방향은 시민적 민족주의의 초석이 되는 길이다.

Ⅵ. 맺음말
황병학 의쟁투쟁의 뜻과 의의를 기리는 기회를 통해, 한말 의병 운동이 지니고 있는 이념적 특성이 무엇이고, 이러한 의병정신이 오늘의 우리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기능을 할 것인가에 탐구해 보았다.
의병 정신은 한국 사회를 정의로운 공동체로 구현하는데 밑거름이 되는 정신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의병운동은 시민운동의 좌표로서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한말 의병 운동의 초기 연구가인 박은식은 “의병이란 민군이다. 이들은 국가가 위급할 때 조정의 징발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의롭게 종군하는 적개심에 불타는 사람들”로 정의하고 있다. 의병을 진압하려는 조정 스스로가 의병을 민병으로 불렀다. 한국의 의병에 깊은 관심과 경외심을 가졌던 맥켄지(F.A. Mckenzie)는 의병을 나라가 위태로울 때 이를 구하기 위해 공동체 구성원이 스스로 일어난 ‘Righteous Army''로 보고 있다. 한마디로 의병은 국가가 못한 일, 하지 못할 일을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하는 일종의 공동체 운동이다.
필자는 의병정신이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마당으로 시민운동을 거론하고 싶다. 오늘날을 흔히 시민사회로 묘사하기도 한다. 민주주의가 발전되면서 시민은 공동체의 주요 주체로서 등장한 개념이다. 시민은 국가 공동체의 구성 요소이면서 동시에 시민 사회의 주인이다. 시민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책무를 하면서도 국가가 잘못할 경우 이를 견제하기도 하고, 국가의 부정의한 행동에 저항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다양한 시민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시민운동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다. 민주사회에서 시민운동의 당위성은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 현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토대가 없는 위로부터의 시민운동, 집단이기주의의 변형, 선정주의적 운동, 정부의 보조금에 의지하는 의타성, 시민운동의 폐쇄성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민주시민사회에서 시민운동은 정의로운 공동체를 구현하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한다. 시민운동이 정의롭지 못할 때 그 사회는 병들고 혼란스러워 진다.
정의로운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해 의병정신을 갖춘 시민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시민운동과 의병운동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의병운동에 나타난 정신이 우리 한국 사회를 ‘바르고 행복한 사회’로 만드는 정신적 토대와 자양분으로 큰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