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충청북도 동학 유적지 역사기행
부제
  
일시
  2019.11.02~04
작성일
  2019-11-04
조회수
  18

   
 
 
 
 
 
 
 
 
 
 
 
 
 
 
 
 
 
동학농민혁명 자료

1. 충북도, ‘동학’의 가치 ‘재발견’ 작업 시작
민주주의를 향한 인류의 여정에서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동학농민혁명’(동학혁명)을 재발견해 기념하기 위한 작업이 추진된다. 충북도는 10일 충북연구원 4층에서 ‘2019 충북학포럼 주비위원회’를 열어 ‘충북 동학 농민혁명 기념사업’ 추진을 위한 사전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는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정삼철 충북연구원 충북학연구소장, 김양식 수석연구위원,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기념사업부장, 강태재 충북시민재단 이사장, 구왕회 보은 동학농민기념사업회장, 박진수 보은 동학농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등이 참석했다.

동학혁명은 1894년 부패한 정치체제를 개혁하고, 외세에 맞서기 위해 일어난 ‘동학난’이라고도 불리우는 우리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던 ‘반봉건’·‘반외세’ 운동이다. 동학혁명의 주된 사상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이 중심으로, 인간의 사회적 평등과 국가적 자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다. 이로 인해 동학혁명은 인도의 ‘세포이 반란’, 중국의 ‘태평천국의 난’ 등과 함께 아시아 3대 혁명으로 학자들이 꼽기도 한다. 특히, 프랑스 대혁명과도 비교되는 민주주의 쟁취 운동으로도 평가된다. 충북은 1870년대부터 동학의 불씨가 되살아나 전국으로 확산되는 중심부였으며, 보은에 위치한 동학교단은 동학농민혁명기에 전국의 동학도를 지휘했던 곳이다.

동학혁명을 이끈 서장옥(1853~1900)은 전봉준(1855~1895)의 스승으로 일컬어질 만큼 출중했고, 그 외 다수의 인물들과 유적지가 많음에도 이를 기리는 기념비는 매우 보잘 것 없는 수준이다. 충북도에 따르면, 전국에 조성돼 있는 동학혁명 관련 기념시설은 모두 85개로, 충북에는 보은동학농민기념공원을 비롯해 모두 6개가 있지만 제대로 된 시설을 찾을 수 없다. 이와 관련, 충북도는 충북이 동학혁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중심적인 무대였음에도 동학혁명의 가치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 주목,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특히, 정부가 5월 11일을 동학혁명 기념일로 지정해 동학의 가치를 재발견하기 위한 계기를 만든 만큼 국가적 사업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찾기로 했다. 김연준 문화예술산업과장은 “동학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시민혁명을 촉발시킨 사건이었고, 중심사상도 인간의 존중, 사회적 평등과 국가적 자주성을 바탕으로 현대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계기를 만들었다”며 “앞으로 동학혁명의 가치를 알리고, 민족적 자긍심 고취와, 민주주의 승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2. 동학 2甲 맞아 '다시, 사람이 하늘이다'
충북학연구소(소장 김양식 박사)가 지역에서는 흔치 않는 4주 연속의 동학농민혁명 특별기념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특히 충북학아카데미 이름으로 열리고 있는 이번 특별 강좌는 금년이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지 2갑(120년)이 되는 해여서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미 지난 10일에는 한양대 김용휘 교수가 등단, '동학과 현대적 의미' 제목의 특강을 가졌다.

3. 동학 배경지식 뒷받침돼야 생생한 문화콘텐츠 가능"
▲ 지난달 28일 충북발전연구원에서 만난 역사학자 김양식씨.
올해로 2주갑을 맞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1주갑이었던 1954년 당시까지는 농민들의 단순한 무력투쟁 정도로 치부됐다면 그 이후 100주년이되면서 우리 근대사의 중요한 한 대목으로 평가됐다. 이때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학계 연구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80년대 반정부 민주화운동에 나섰던 역사학도들이다. 당시 혈기 왕성했던 이들이 차차 역사학계의 전면에 나서면서 혁명 관련 연구활동도 그 성과를 드러내게 됐다. 이 중 두드러진 연구성과로 학계의 기린아로 꼽히고 있는 김양식 박사(54·충북발전연구원 선임연구위원)를 만나 그동안의 연구활동과 앞으로의 연구과제 등에 대해 들어봤다.

-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한양대 공대에 재학 중이던 시절인 80년대 초 민주화운동이 점차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도 거리로 나가 친구들과 함께 군사정권의 타도를 외쳤습니다. 그러면서 점차 이런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던 중에 대학 동아리를 통해 여러 사회과학 서적을 접하게 됐습니다. 이때부터 민중을 계몽하는 학자의 길로 들어서고자 하는 마음이 싹 텄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민중이 주도가 된 동학혁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깊이 파고들면서 어느새 제 전문분야로 자리잡게 됐죠.”

- 연구활동 중 가장 주안점을 둔 분야는.
“근대 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보면 토지 문제가 가장 큽니다. 처음엔 이런 국유지 관련 토지분쟁을 깊이 있게 연구했습니다. 그러다가 혁명 과정에서 집강소(혁명 당시 농민자치기구)를 다룬 기존 연구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기존 연구자들은 집강소의 역할을 너무 일률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또 집강소는 전주화약 당시에 설치하기로 약속한 것이 아니라 전봉준과 당시 전라감사 김학진 사이 열린 회담에서 합의된 것입니다. 이와 함께 당초 집강소의 설치 목적은 민정기능을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 이후 흐트러진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농민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 기능이 민정기능으로까지 확대된 것일 뿐입니다. 이것도 점차 반농민군이 힘의 우위를 점하면서 다시 치안유지만을 맡는 것으로 기능이 축소됐습니다. 이처럼 혁명을 다룬 기존 연구의 오류를 바로잡는데 중점을 뒀습니다.”

- 그간의 다른 역사학자들의 연구활동을 평가한다면.
“혁명 과정에서 민중의 존재를 너무 강조하다 보니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 소홀한 측면이 있습니다. 민중의 투쟁에만 천착하다보니 동학의 조직과 실체에 대한 연구는 미진했던 것 같습니다. 1주갑 이후의 연구가 투쟁사 중심이었다면 2주갑 이후는 연구의 폭을 넓혀, 동학이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된 배경과 동학사상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 동학 2주갑의 역사적 의의는.
“21세기 한국의 운명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변화의 물줄기 속에서 큰 격변에 처할 것으로 보입니다. 근대의 혁명이 자본의 혁명이었다면 최근의 혁명은 정보를 가치로 삼습니다. 일반 대중들이 정보화사회에서 정보에 소외되고 조종당하는 상황이 심화하면서 정보 빈부격차가 커지고 있습니다.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도 눈 여겨봐야 합니다. 동학혁명을 거울 삼아 당시 민중들의 고민, 시대적 상황, 지식인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했던 노력들을 현재 시대에 비춰봐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야 합니다.”

- 2주갑을 맞이했지만 아직 일반 대중들의 관심이 미흡한 데요.
“대중들이 혁명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화콘텐츠 계발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콘텐츠를 창출하기 위한 대중문화예술가들의 혁명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의미 있는 콘텐츠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혁명에 대한 이미지가 수탈과 외세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만 빠져 있어, 동학을 해석하는 관점의 폭이 좁은 것도 문제입니다. 이에 앞으로는 혁명이 발발하게 된 이면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종교로서의 동학이 농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근대화과정에서 동학이 우리나라 국가 형성에 미친 파장에 대한 이해가 필수입니다.이런 배경지식이 뒷받침돼야 보다 생생한 문화콘텐츠가 만들어져 대중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입니다.”

● 역사학자 김양식 씨는 공대 출신…10년 넘게 동학연구
충북 청주 토박이인 김양식 박사는 지역의 역사·문화에 대해 관심이 깊다. 그는 다양한 연구활동을 통해 충북 역사바로세우기를 실현해나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충북발전연구원 부설 충북학연구소가 있다. 그는 이곳에서 충북의 역사와 문화, 민속, 사상 등을 조사·연구하고 있다. 특히 그는 동학농민혁명을 주전공으로 삼아 충북지역의 동학 교단의 역할, 혁명에 투신한 충북인 등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한 동학 연구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원래 이공계 출신이다. 하지만 80년대 반정부 투쟁에 나서면서 고질적인 사회문제를 개선할 필요성을 느껴 역사교육학과로 전공을 바꿨다. 그리고 단국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 근대사를 주로 연구하다가 동학의 형성과 농민혁명 전개과정에 매력을 느낀 나머지 십여년 전부터 동학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지리산에 가련다〉 〈근현대 충북의 역사와 기억〉 〈충북의 하늘위에 피어난 녹두꽃〉 〈새야 새야 파랑새야〉 등이 있다. 그는 연구활동을 위해 전북을 자주 찾는다. 혁명 유적지가 다수 분포된 고창과 정읍, 전주 등 역사의 현장을 직접 답사한다. 이 때문인지 그는 지인들로부터 ‘반 전북사람’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고 한다.

그는 “충북과 전북은 역사적 배경이나 사람들의 성향 등 닮은 구석이 많다”면서 “연구활동을 위해 자주 찾다보니 어느새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는 존경하는 동학연구자를 묻는 질문에 “이이화 선생님과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이다”며 “이 분들의 연구 발자취를 더듬어가다보니 지금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동학 2주갑을 맞아 이제는 동학의 근간에 대해 좀 더 파고들고 싶다는 김양식 박사. 그는 지금도 좁은 자신의 연구실 한켠에 무더기로 쌓아놓은 각종 서적들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을 것이다.

4. 아래로부터 민중 항쟁 유적지 등 들여다보니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의 개혁을 위해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2차로 봉기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중심의 혁명이었다. 그로부터 120년의 시간이 흘러 다시 '갑오년'을 맞이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 사상을 기반으로 한 동학은 당시 제국주의의 열강과 봉건체제의 폭정 아래 신음 하던 백성들에게 구원의 소리로 다가왔다. 평등사상을 기반으로 한 동학은 신앙대상에 대한 믿음보다는 주체적인 자각과 실천을 강조했다. 대전일보사는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충청지역 주요 유적지를 돌아보고 동학의 현재적 의미를 재 조명하는 기획 시리즈 '충청지역 동학의 발자취를 찾아서' 연재한다. 모두 4회에 걸쳐 보은, 옥천, 공주 등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던 전적지와 기념시설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혁명의 흐름을 되돌아 보고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조명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
1894년 1월 고부농민봉기에서 시작돼 1895년 1월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회적 사건이 아니었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장기적으로 이어진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후기 빈번했던 민란의 연장선 위에서 종래의 민란을 집약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상적·조직적 배경에는 조선 후기 이래 '밑으로부터' 표출되고 있던 민중들의 변혁의지를 수용해 체계화한 동학이라는 새로운 사상과 동학의 '포접(包接)' 조직이 자리하고 있었다. 피지배 계층의 사상적 견해를 반영하고 있던 동학사상과 전국적 조직이던 동학교단을 매개로 광범위한 농민 대중이 참여했고 개화파가 주도했던 갑신정변이나 독립협회운동, 재야유생이 주도했던 위정척사운동이나 의병 항쟁 등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나, 동학농민운동은 피지배 계층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항쟁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종래 군·현 단위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던 항쟁을 전국 차원의 항쟁으로, 일시적 투쟁에서 장기 지속적인 항쟁으로 발전해 나갔으며, 조선 후기 빈발 했던 농민봉기 단계에서 나타났던 민중의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의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대규모 농민 대중에 의한 혁명이었다. 또 일본의 침략 야욕과, 부패·무능한 조선왕조 봉건 지배층의 외세 의존 및 보수 유생의 체제 수호의 벽에 좌절하였으나, 1894년 이후 전개된 의병항쟁, 3·1 독립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회개혁 운동과 자주적 국권 수호운동으로서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민중운동의 근간이 됐다.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의 흐름
1894년 1년간 전개되었던 동학농민혁명은 1892년에서 1893년까지 동학교단의 조직적인 교조신원운동과 1894년 1월 고부 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3월 전라도 무장에서 전면적으로 시작됐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은 크게 여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1892년에서 1893년까지 동학교단과 일반 민중들이 전개한 교조신원운동단계, 둘째는 1893년 11월의 사발통문 모의에서 비롯된 1894년 1월 고부농민 봉기, 셋째는 1894년 3월 21일 전라도 무장에서 일어난 제1차 동학농민혁명, 넷째는 5월 7일 전주화약을 계기로 이뤄진 집강소 통치기, 다섯째는 6월 21일 일본군의 경복궁 불법침입 사건을 계기로 봉기한 제2차 동학농민혁명, 마지막 여섯째는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걸쳐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이 패배한 후 이뤄진 농민군 진압 및 학살이 그것이다.

이 여섯 단계 중 충청지역은 첫 번째 단계와 마지막 여섯 번째 단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대체로 북접 계통의 영향 아래 있던 충청지역은 공주 우금치 전투로 대표되는 제2차 동학농민운동의 주요 전장이었다. 물론 그 전에 교조신원운동 단계인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의 집회 때 아산, 홍주 등지에서 동학농민군들의 술렁임이 있어서 수령들이 서울로 피해가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고 한다. 명지전문대학교 채길순 교수는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영남·영동 지방에 이어 소백산맥에 의지해 단양, 괴산 지역을 시작으로 동학 포교를 시작했다"며 "이후 동학은 충북 전 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돼 나갔고 동시에 서울 경기와 충청 내포 지역으로 뻗어나가게 됐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후 1894년 제2차 동학농민혁명 시기 당시 9월에 최시형을 중심으로 북접의 무력봉기 선언이 있은 다음부터 충청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전장은 동학농민혁명 최대의 격전지였던 우금치를 중심으로 한 공주 일대였지만, 공주 서북쪽으로 예산, 덕산, 유구를 비롯해 서산, 태안, 해미 등 내포지방에서도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줄기차게 전개됐으며, 남쪽으로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서천, 한산 지역에서도 이미 1차 동학농민혁명 시기부터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시작됐다. 9월 중순 삼례에서 일어난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북상해 여산, 은진을 거쳐 강경에 도착한 것은 10월 초순이었으며, 10월 9일에는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의 주력부대와 합류했다. 한편 북접계통의 다른 한 부대는 청산에 집결하였다가 공주를 향해 남하, 10월 23일에는 공주 동북쪽에 있는 대교(장기면)까지 진출해 논산을 거쳐 북상하는 호남의 동학농민군과 호응하였다.

동학농민군의 공주성 공격은 10월 23일 이인전투에서 시작돼 24일 대교전투, 25일 효포, 능치전두, 그리고 최후의 항전인 11월 9일의 우금치 전투로 이어졌다. 동학농민혁명의 성패가 달린 공주 공방전에서 동학농민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맞서는 관군과 일본군의 저지를 뚫지 못하고 끝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2차 기병으로 모아진 거대한 동학농민군의 힘이 공주성을 에워싸고 폭발하였으나, 수없이 많은 동학농민군을 공주전선에 묻어버린 채 호남지방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그 후 남쪽으로 퇴각한 동학농민군들이 다시 힘을 모아 원평과 태인 등지에서 반격전을 폈으나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충남 남부와 내포지역의 동학농민군 역시 공주를 향한 진출을 끈질기게 시도했으나 11월부터 본격화된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점차 사그라졌다.

충청에서 활약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천안 목천의 김용휘, 김성지, 김화성 등 이른바 '삼로(三老)'로 불리던 세 동학지도자들이 1894년 10월 8일부터 3일간 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며 예산지역은 박희인, 박인호, 홍종식 등이 이끈 동학농민군이 예산, 홍성 등지에서 치열한 항쟁을 벌였다. 충주와 청풍의 경우는 성두환이, 청주는 임규호, 권병덕이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충청지역은 전라도 중심의 동학농민혁명 연구 분위기에 밀려 아직 상세하게 해명되지 못한 지역이 대부분이어서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충청지역 주요 유적지
동학과 관련된 충청지역 대표 유적지는 공주 '우금치'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을 비롯해 동학의 전파과정에 있어 충청지역에는 특별히 주목해야 할 몇몇 유적지들이 존재하고 있다. 공주 송장배미는 충남 공주시 금학동에 위치해 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은 우금치를 공격하는 한편 봉황산의 하고개를 넘어 감영의 배후를 치고자 했다. 그러나 하고개는 천혜의 요새로 계곡을 가득 메운 농민군의 시체만 남긴 채 후퇴해야 했다. 농민군의 시체를 한 곳에 모아 매장했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송장배미라는 논이다.

천안 세성산 전투지는 충북 천안시 성남면 상동리이다. 세성산 전투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공주전투의 전초전이었다. 천안, 전의,목천 등에서 기포한 동학교단 측 농민군은 그곳의 농민군지도자 김복용을 중심으로 천혜의 요새인 세성산을 근거지로 해 남하해 오는 관군과 일본군을 격퇴한 후 공주로 진격해 오는 농민군과 합세해 서울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894년 10월 21일 장위영과 이두황이 이끌고 온 관군과 이를 지원한 일본군의 공격에 300여 명의 전사자를 낸 채 패배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이 패배함으로써 공주일대에 집결한 농민군의 사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보은 취회는 동학 역사에서 주요한 의미를 지닌다. 교조신원을 위한 광화문복합상소 직후 동학교단은 1893년 3월 11일 대도소가 있는 보은군 외속리면 장내리에서 교조신원과 함께 척왜양창의 기치 아래 다시 집회를 가졌다. 전라, 경상, 충청, 경기, 강원 등지에서 모인 수 만명의 동학교도가 집회에 참석했다. 이들은 산 아래 평지에 성을 쌓고 대오를 정비하며 '척왜양창의' 라고 쓴 깃발을 내거는 등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조정에서는 1893년 3월 25일 충청감사 조병식을 파직하고 집회군중을 해산시킬 선무사로 어윤중을 보내는 한편, 충청병사 홍재희에게 군사 300을 이끌고 보은으로 가게 하였다. 이 같은 압박 속에서 동학교도는 어윤중의 해산 회유과 군대의 압력에 굴복하고 스스로 해산하고 말았다. 최신웅 기자
도움말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충북학연구소·공주시·보은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