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연해주 학술기행
부제
  블라디보스톡-우스리스크-핫산 역사기행
일시
  2010.08.13~08.17
작성일
  2010-08-18 오후 10:58:00
조회수
  6920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한국정치외교사학회가 주관하는 연해주 학술기행을 다녀 왔다. 블라디보스톡에서는 세미나를 실시했고, 우스리스크에서는 독립운동 유적지를 답사했으며, 핫산의 두만강 철교를 다녀왔다. 거기서 보고 찍은 사진과 여행지 관련 정보를 함께 싣는다.

1. 세미나
<주제: “한러관계사의 연구현황과 한러관계 증진의 길”
- 일정: 8월 14일 09:00 - 12:00
- 개회사: 이재석(회장/인천대)
- 기조 연설:
블라디보스톡 김무영(KIM MOOYOUNG)총영사
라린(Victor Larin)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 소장
1부: “한러관계사의 연구현황과 한러관계의 주요쟁점”
- 사회:신복룡(건국대)
1. 20세기 한러 교섭관계 사료현황 연구
토로포프(Alexander A. Toropov/ 러시아 극동문서보존소)
토론:김혜승(한양대),자블로스카야(Larisa Zabrovskaya/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
2. 1940년대 독립운동연구(양병기/청주대)
토론: 김창회(전북대), 우승지(경희대)
3. 사할린 교포 법적 지위와 보상문제(박종효, 전 모스크바대)
토론: 크루사노바(Larisa A. Krushanova/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 모준영(나라정책연구원)
4. 한러 우호증진을 위한 또 하나의 길: 한국 전쟁포로 생사확인과 냉전잔재의 청산(조성훈/군사편찬연구소)
토론: 남정욱(블라디보스톡 공대), 이재형(인천대)

2. 연해주 개관
프리모르스키 지구 [연해주] (영)Maritime Region. Primorskij Kraj라고도 씀.
러시아 연방의 행정 지구.
동해(東海)와 둥베이[東北 : 옛 지명은 만주] 지구 사이에 있으며, 한국에서는 연해주라고 한다. 러시아 연방 극동 지방의 지구들 가운데 가장 작으며, 최남쪽에 있다. 1926년 원래 소비에트 극동 공화국이었던 지역이 극동지구로 바뀌었고, 1938년 극동지구의 일부가 분리되어 지금의 프리모르스키 지구가 되었다. 최고높이가 1,855m에 이르는 시호테알린 산맥이 해안선과 나란히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있으며, 이 지구의 주요강인 우수리 강(아무르 강의 지류)은 러시아 연방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며 북쪽으로 흐른다. 연안 평야는 좁고 항구도 거의 없으며, 짧고 물살이 빠른 작은 강이 몇 개 흐를 뿐이다. 남쪽에 있는 페트라베리코고 만(표트르 대제 만)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천연 입지조건이 잘 갖추어진 항구로 꼽힌다. 이 만의 후미인 졸로토이로크(''황금뿔''이라는 뜻) 만 연안의 반도에는 이 지구의 행정중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아시아권 러시아의 주요항구이며,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태평양 연안 종착지이다.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겨울에는 몹시 춥고, 4계절 내내 북풍이 끊이지 않는다. 바다에서 육지 쪽으로 남동풍이 부는 여름에는 비가 많고 따뜻하다. 남쪽의 우수리 강과 한카 호(중국에도 걸쳐 있음) 주변의 비옥한 저지대에서는 콩·수수·벼 재배가 이루어지고, 채소재배와 낙농도 활발하다. 탄광산업이 여러 도시의 다양한 제조업을 뒷받침하고 있다. 레티호프카와 노보샤흐틴스크에는 노천석탄 광상이 있다. 주석·납·아연·형석도 채굴된다. 북부의 보스토크에 있는 텅스텐 광산은 1970년대에 개발되었다. 해안에는 어업기지와 포경기지가 있고, 시호테알린 산맥에서는 목재가 생산되며, 작은 모피동물이 서식한다. 1979년 기준 프리모르스키 지구 주민 대부분이 러시아인(85%)이었으며, 우크라이나인(9%)과 우데게이족·오로치족·나마이족 같은 소수 민족이 나머지를 차지했다. 주요도시로는 블라디보스토크 이외에 우수리스크, 나호트카, 아르티옴및 파르티잔스크등이 있다. 주민의 75%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1982). 면적 165,900㎢, 인구 2,309,000(1992).

3. 우스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1천300여 평 규모로 기존의 유치원을 구입해 사용하던 것을 증개축한 이 문화센터는 한인 이주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전시관을 비롯해 한국어와 컴퓨터를 배울 수 있는 정보화센터, 병원, 다목적 공연장과 공원 등으로 구성돼 있다.
"동북아평화연대와 재외동포재단이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2004년)을 기념해 2006년 짓기 시작한 고려인문화센터가 3년 만에 완공됨으로써 140년 간 3차례에 걸친 한인 이주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고려인들이 한ㆍ러 양국 간 우호협력의 매개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한인들은 1864년 연해주로 이주해 힘겹게 삶의 터전을 일궜지만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약 18만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고 이어 1990년대 초 구 소련이 해체되고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각각 독립하면서 러시아어를 쓰는 한인들이 다시 연해주로 돌아와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현재 연해주에 살고 있는 고려인은 4만여 명이고 고려인 문화센터가 들어서는 우스리스크에만 약 2만명이 산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당시 연해주 고려인은 약 18만명으로 당시 이곳 인구의 10%가 넘었다.
고려인 문화센터는 러시아 국적 재취득과 취업 및 사회보장 등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려인 동포들을 돕기 위해 양국 정부 합의로 건립이 추진됐으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러시아 정부가 2003년 12월 ''러시아연방 고려인 이주 140주년위원회''를 만들고 당시 이부영 전 의원이 기념관 건립 추진위를 맡아 양국이 기념관 건립 협약서를 체결하면서 사업이 시작됐다. 이어 한국 정부는 2005년 12월 국회를 통해 약 24억원의 사업비를 책정했으나 중도에 시공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정부가 예산 집행을 미뤄 2008년 말 공사가 중단됐다가 지난 2009년 8월에야 가까스로 준공되었다.

4. 역사적 인물
- 최재형: 함경도 노비의 아들 태어난 최재형은 1869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한국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던 러시아 지신허에 갔다. 배고픔 때문에 가출한 재형소년은 항구에서 우연히 만난 러시아 선장 부부의 보살핌을 받았다. 학식이 뛰어난 선장 부인은 러시아어와 서양학문을 가르쳤으며, 선장은 재형소년이 해외에서 견문을 넒필 수 있도록 하였다. 덕분에 최재형은 풍부한 학식과 넒은 사고를 가진 지식인 청년으로 성장했다. 군수업으로 1년수입이 10-12만불에 달하는 막대한 부를 쌓은 최재형은 한국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했기 때문에,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덕분에 그가 활동한 러시아 연해주 연추의 한국인 사회는 한국인 최재형이 도헌(군수정도 되는 공직)에 선출될 정도로 러시아사회에서의 위치가 높아졌다.
최재형은 자신이 모든 재산을 항일운동을 위해 대부분 사용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모든 항일 의병 세력을 단결시킨 동의회를 결성하였는데, 동의회는 러시아국경의 일본군 초소와 소규모 부대들을 모두 격파하고, 많은 탄약과 소총을 탈취하는 군사적 활약을 했다. 당시 일본군은 전사자가 40여명에 달했으나, 의병들은 부상자가 4명에 불과한 가벼운 손실만 보았을 뿐이다. 또한 최재형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일본이 아닌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한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1910년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자, 최재형은 자신이 안중근 의사를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감을 느껴 안중근 의사의 부인과 아이들을 보호하였다. 이 사건으로 연해주의 한국인들은 더욱 러시아의 감시를 받게 되었고, 권업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최재형도 그를 간첩으로 몬 일본의 음모로 체포되었다. 곧 무혐의 결정으로 석방되었으나, 러시아정부에서 더 이상 그와 상거래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최재형은 한 초라한 집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20년 러시아의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말았다. 당시 최재형의 나이 61세였다.

- 홍범도: 홍범도 장군은 의병전쟁 및 항일독립전쟁기의 대표적 장군으로 봉오동(鳳梧洞)·청산리(靑山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민족주의와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철저한 무장투쟁노선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홍범도 장군은 의병전쟁 및 항일독립전쟁기의 대표적 장군으로 봉오동(鳳梧洞)·청산리(靑山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민족주의와 민중의 힘을 바탕으로 하는 철저한 무장투쟁노선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일명 범도(範道).
- 청년기: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작은아버지 집에 기거하면서 머슴살이를 했다. 1883년(고종 20) 평양우영(平壤右營)에서 나팔수로 복무하다 탈영하여 황해도 수안 총령(蔥嶺)의 제지소에서 3년간 일했다. 1891년경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2년간 상좌로 있으면서 지담(止潭)으로부터 글을 배우고 승군(僧軍)의 활동 등에 대해 들으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강원도 철령(鐵嶺)에서 소규모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이듬해 14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함경남도 안변으로 가 석왕사(釋王寺)에 주둔하고 있던 유인석(柳麟錫) 의병과 연합하여 싸웠다. 을미의병 해산 이후 체포를 피해 돌아다니다 북청에서 산포수(山砲手) 생활을 하면서 소규모 항쟁을 계속했다. 1907년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일제는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을 만들어 항쟁의 확산을 저지하려 했다. 이를 계기로 차도선(車道善)·태양욱(太陽郁)·송상봉(宋相鳳)·허근(許瑾) 등과 함께 북청 후치령(厚峙嶺)에서 포수·농민 들을 모아 다시 기병했다. 처음에는 600~700명의 부대원들을 이끌고 기동 유격전술을 펼쳤으나, 일본군이 대규모 토벌 공세에 나서자 소규모 부대를 중심으로 한 매복·기습 전술로 전환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07년 12월 삼수 전투에서 일본군 함흥·북청·갑산 수비대를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이원·단천·혜산 등지에서 37회에 걸친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진회원(一進會員)들을 사주하여 아내 이씨(李氏)를 체포·처형했다. 이후 갑산·무산·종성에서 전투를 벌이다 국내에서의 항쟁의 한계와 근거지 건설에 기반을 둔 지속적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느껴 지린[吉林]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 해외무장투쟁: 1911년 망명 직후 서간도 만간구(萬干溝)에서 차도선·김택룡(金澤龍)·홍사현(洪思鉉) 등과 함께 의병 중심의 친목회를 조직하여 독립군으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두·광산·농업 노동자로 일하는 한편 노동회(勞動會)를 조직, 임금의 일부를 군자금으로 비축했다. 아울러 이종호(李鍾浩)·이상설(李相卨) 등이 중심이 된 권업회(勸業會)의 사찰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니콜리스크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했다. 1918년 8월 일본군이 러시아 10월혁명을 탄압하고 백위파(白衛派)를 지원하면서 한인(韓人) 민족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연해주 지방에 침입하자, 호범도는 김만겸(金萬謙) 등이 주축이 되어 건설한 대한국민회의(大韓國民會議) 간도·훈춘[琿春] 지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100여 명의 대원을 이끌고 적군(赤軍)과 함께 반일·반백위군 투쟁을 벌였다. 1919년 우수리스크를 거쳐 중국령 따차무정재[草帽頂子]·하마탕[蛤莫塘]을 경유하여 국내로 진군하면서 부대를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으로 개칭·재편했다. 같은 해 8~10월 혜산진·만포진·자성 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다음해 3~6월 온성·종성 일대로 진격했다. 이어 1920년 5월 28일 봉오동에서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武都督府),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부대 및 신민단(新民團) 독립부대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하고 북로제일군(北路第一軍) 사령부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6월 4일 삼둔자(三屯子)에서 일본군 중대병력을 궤멸시키고 다음날 후안산(後安山)에서 적 대대병력을 격파했다. 이어 추적해오는 일본군 19사단 병력을 7일 새벽 봉오동으로 유인, 매복전술로 적 300여 명을 사상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대한독립군의 근거지를 옌지 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이도구(二道溝)로 옮기면서 같은 해 9월 신민단·의군부(義軍府)·국민회군·한민회군(韓民會軍) 등 800여 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김좌진(金佐鎭) 부대, 최진동 부대와 연합하여 청산리의 백운평(白雲坪)·완루구(完樓溝)·천보산(天寶山)·고동하곡(古洞河谷) 등에서 일본군 37여단 1만 5,000여 명을 맞아 싸워 3,000여 명을 살상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 안중근:
1907년 이전에는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 계몽운동을 벌였고, 그뒤 러시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1909년 초대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조선침략의 원흉으로 지목하여 하얼빈[合爾濱]에서 사살했다. 본관은 순흥(順興).
- 초년: 할아버지는 진해현감을 지낸 인수(仁壽)이며, 아버지는 진사 태훈(泰勳)이다. 태어날 때 배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개화당의 일원이었던 아버지가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피신했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세운 서당에서 공부를 했으나 사서오경에는 이르지 못하고 〈통감〉 9권까지만 마쳤다고 한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겼고, 집 안에 자주 드나드는 포수꾼들의 영향으로 사냥하기를 즐겨 명사수로 이름이 났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 해주감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할 때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 진압군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천주교를 통해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졌으며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다. 한때 교회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뒤에 만인계(萬人契:1,000명 이상의 계원을 모아 돈을 출자한 뒤 추첨이나 입찰로 돈을 융통해주는 모임)의 채표회사(彩票會社:만인계의 돈을 관리하고 추첨을 하는 회사) 사장을 지냈다. 17세에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다.
- 계몽운동 및 의병활동: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상하이[上海]로 갔으나 기대를 걸었던 상하이의 유력자들과 천주교 신부들로부터 협조를 거절당하고 이무렵 아버지가 죽어 다시 돌아왔다. 1906년 3월에 이사한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이를 정리하고 삼흥학교(三興學校:뒤에 五學校로 개명)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천주교 계열인 남포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했다. 1907년에는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호응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독립전쟁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일본군과 싸우다가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하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계동청년회(啓東靑年會)의 임시사찰(臨時査察)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의병부대의 창설을 협의하는 한편, 엄인섭(嚴仁燮)·김기룡(金起龍) 등과 함께 의병부대 창설의 준비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최재형(崔在亨)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연해주의 한인촌을 돌아다니며 독립전쟁과 교육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의병을 모았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이범윤을 총독, 김두성(金斗星)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참모중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두만강 부근의 노브키에프스크를 근거지로 훈련을 하면서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으로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그뒤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흥과 신아산 부근에서 전투를 벌여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때 기습공격을 받은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사로잡은 일본군 포로를 국제공법에 의거해서 석방해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의병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부대는 해체되었다.
-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에서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김기룡·황병길·강기순·유치현·박봉석·백낙규·강두찬·김백춘·김춘화·정원식 등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그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한다고 맹세했다. 9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원동보 遠東報〉와 〈대동공보 大東共報〉를 통해 이토가 북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와 회견하기 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하얼빈과 채가구(蔡家溝)를 거사장소로 설정하고, 채가구에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그는 하얼빈을 담당했다.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이어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만철(滿鐵) 이사 다나카[田中淸太郞] 등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과 재판과정에서 한국의병 참모중장이라고 자신을 밝히고,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며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거사동기를 밝혔다. 러시아 관헌의 조사를 받고 일본측에 인계되어 뤼순 감옥으로 옮겨졌다.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여러 차례의 재판을 받는 동안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했고 참모중장으로서 이토를 죽였으니 이 법정에서 취조받을 의무가 없다"라고 재판을 부정하고, 자신을 전쟁포로로 취급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일본검찰에게 이토의 죄상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 1905년 11월에 한일협약 5개조를 체결한 일, 1907년 7월 한일신협약 7개조를 체결한 일, 양민을 살해한 일, 이권을 약탈한 일, 동양평화를 교란한 일 등 15가지로 제시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밝혔다. 당시 국내외에서는 변호모금운동이 일어났고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일본인 관선변호사 미즈노[水野吉太郞]와 가마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이상설: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외교권이 없는 나라의 대표라는 제국주의 열강의 반대로 실패하고, 이후 각국에서 외교운동을 벌였다(→ 헤이그 밀사사건). 1914년 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등에 있는 동지를 모아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본관은 경주.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 관직생활 및 국권회복운동
아버지는 행우(行雨)이나, 1876년 용우(龍雨)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춘방시독관에 제수되고 다음해 비서감비서랑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재무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무렵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하자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해 8월 보안회(保安會)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大韓協動會)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다음해 법부협판·의정부참찬을 지냈다. 이무렵부터 여준(呂準)·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범세(李範世) 등과 외국 서적을 들여다 만국공법(萬國公法) 등 법률을 번역·연구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올렸으나, 12월 체직(遞職)되어 관복을 벗고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11월 24일자에 〈독이참찬소 讀李參贊疏〉라는 제목으로 ''순사지의(殉社之義)로써 임금에게 고한 대충대의(大忠大義)의 사람은 오직 이참찬뿐''이라고 게재했다. 민영환(閔泳煥)의 순국 소식을 듣고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 망명과 헤이그 특사
1906년 이동녕·정순만(鄭淳萬) 등과 조국을 떠나 상하이[上海]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추(煙秋)로 가서 이범윤(李範允)과 국권회복운동의 방략을 협의하고, 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갔다. 이곳에서 여준·왕창동(王昌東)·박무림(朴茂林) 등과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해 문을 닫았다. 1907년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이준(李儁)과 이위종(李瑋鍾)을 부사로 삼아 파견했다. 5월 차고려(車高麗)의 안내로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르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들은 대한제국의 실정과 국권회복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으나 한일협약은 각국 정부가 승인했으므로 외교권이 없는 대한제국 대표의 참석과 발언은 허용할 수 없다고 거절 당해, 제국주의 열강의 이익협상의 장이었던 회의에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6월 대한제국의 정당한 주장을 밝힌 〈공고사 控告詞〉를 만국평화회의와 각국 위원에게 보내었고, 7월에는 이위종이 국제협회에서 세계 언론인들에게 ''한국의 호소''를 연설하여 국제여론에 한국문제를 부각시켰다. 회의 참석이 끝내 거부되자 7월 14일 저녁 이준이 헤이그에서 순국하여 그곳 아이큰다우의 공원묘지에 매장하고, 이후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 등 여러 나라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영세중립화를 역설했다. 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들어 일제는 특사를 위칭(僞稱)했다고 하여 재판에 회부, 궐석 판결로 이상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하는 한편 선위(禪位)라는 미명으로 고종을 강제퇴위시켰다.
- 외교운동과 망명정부 수립
1908년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지원을 계속 호소하는 한편, 각지의 한인교포를 결속시키는 데 힘쓰고,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에 연해주 한인대표로 참석했다. 1909년 국민회(國民會) 중심의 독립운동 확대를 위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승희(李承熙)·김학만(金學萬)·정순만 등을 규합해 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방 싱카이 호[興凱湖] 남쪽 봉밀산(蜂蜜山) 부근에 한인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했다. 1910년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유인석·이범윤·이남기(李南基)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 도총재에 유인석을 선임하고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을 상주하고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시도했다. 이해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족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한일합병의 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미국·러시아·중국 등에 일제의 침략규탄과 한민족의 독립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 이해 일제의 교섭에 의해 러시아 관헌에 체포되어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다음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으로 왔다. 김학만·이종호(李鍾浩)·정재관(鄭在寬)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권업신문 勸業新聞〉을 간행하고 한인학교를 확장시키는 한편, 한인교포의 경제향상과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기관으로 발전시켰다. 1914년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규합한 모든 동지들을 모아 한일합병 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대한광복군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일본과 러시아가 연합국으로 동맹하여 한인의 정치·사회 활동을 엄금했기 때문에 표면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채 해체되었고, 권업회마저 러시아 관헌에 의해 해산당했다. 1915년 상하이에서 박은식·신규식·조성환 등이 신한혁명단을 조직하여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1917년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으로 죽었다.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71년 보제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숭모비(崇慕碑)를 건립하고, 1975년 숭렬사(崇烈祠)를 건립했다.

- 이위종: 한말의 외교관·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범진(範晉)이다. 외국공관장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을 순회하여 외국어에 능통했다. 아버지가 주러시아 공사가 되자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한국공사관 참서관(參書官)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어 각국 주재 한국공사관이 폐쇄되고, 일본정부가 소환령을 내렸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하면서 외교활동을 했다.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고종은 밀사를 파견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열강의 도움을 받아 보호국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헤이그 밀사사건). 그는 3명의 밀사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어 정사 이상설(李相卨)과 부사 이준(李儁)이 6월 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할 장서(長書:控告詞)를 번역했다. 러시아 외무부의 동정을 살펴보았으나 희망이 없자 6월 19일 그곳을 출발, 독일의 베를린에서 장서를 인쇄하고 6월 25일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헤이그에 도착했다. 헤이그에서 장서와 그 부속문서인 일인불법행위(日人不法行爲)를 프랑스어로 만들어 일본을 제외한 40여 개국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고, 각국의 대표위원들을 만나 지원을 호소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이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특히 영국인 스테드가 회장으로 있는 국제협회의 후원을 얻어 그 회보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했다. 7월 9일에는 국제협회의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연설할 기회를 얻자 이위종은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당한 경위와 일본의 침략상을 낱낱이 지적하여 폭로·규탄하고, 한국민과 황제는 독립을 열망하고 있으니 세계는 한국독립에 협조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의 열정적인 호소는 각국 언론인은 물론 만국평화회의의 각국 대표 및 수행원에게까지 감명을 주었으며, 이후 각국 신문이 매일같이 한국의 사정을 논하게 되어 한국에 대한 여론이 일어났다. 그가 국제협회 연설 직후 잠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간 사이 이준이 단식하여 병이 나고 마침내 7월 14일 순국하자 그의 유해를 헤이그 공동묘지에 가매장하고, 20일 영국의 런던을 거쳐 8월 1일 미국으로 가 그곳에서 활동했다. 9월초 다시 헤이그에 가서 9월 6일 이준의 장례를 치르고 다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이 밀사사건으로 세 밀사는 일본통감부의 궐석재판에서 종신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항일민족운동에 가담했으며,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권업회(勸業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담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지헌허: 러시아최초 한인마을 지신허 발견 2001년 8월 한겨레신문 보도
러시아 지역 최초의 한인마을이며 `13도의군'' 편성대회 장소로 추정되는 지신허(Tizinkhe)를 비롯한 러시아 극동 지역의 한인 독립운동 근거지 11곳이 국내 처음으로 그 구체적인 위치가 확인돼 주목된다. 국가보훈처는 31일 `러시아지역 독립운동사적지 발굴 조사단''(단장 반병율 한국외국어대 교수)이 지난 7월17일부터 20일간 연해주와 아무르주, 자바이칼주 등 러시아 3개주에 대한 현지조사를 통해 이같은 성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조사단은 각종 역사자료와 러시아 농민들의 증언을 통해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가 이룩한 최초의 한인마을인 지신허가 연해주 남부 바라바노프강과 비노그라드나야강 사이에 있었으며, 1937년 중앙아시아로 한인들이 강제이주되면서 폐촌이 됐으나, 현재 당시의 유물로 확실시되는 집터 5곳과 연자방아 맷돌 2개, 곡식 저장 항아리 파편 등을 찾아냈다. 지신허는 강제 이주전까지 1천700여명의 한인들이 모여 살던 큰 마을로서 현재 50만에 이르는 러시아 거주 한인들의 발원지가 되는 곳이며,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지낸 최재형 선생이 의병 200명과 의병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또 한일합방 직전인 1910년 6월 의병장 유인석 장군과 홍범도 장군 등 항일의병 세력이 결집한 `13도의군''의 편성장소가 지신허거나 여기에서 3∼4㎞ 떨어진 자피거우(Chapigou)인 것으로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게 됐다.

조사단은 직접 답사를 통해 △남부 우수리 크라스키노 지역의 지신허와 우스리스크 △수이푼 지역의 시넬리니코보Ⅰ(영안평 또는 대전자) 마을, 시넬리니코보Ⅱ 마을 △아누치노 지역의 카자케비체바(리포) 마을 △로마노프카.빨치산스크 지역의 니콜라예브카(신영동), 큰영, 나홋카(동개터) 다우지미, 우지미, 가이다막(청류애)마을 등 11곳의 위치와 전체적인 면모를 처음으로 확인, 앞으로 구한말 의병과 독립운동단체, 빨치산 부대의 이동경로와 활동지역을 지도상에 표시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조사단은 그동안 문헌자료에서 초기 한인마을의 하나로 기록된 `동개터''가 현재의 나홋카임을 최초로 확인, 국제적 무역항으로 유리한 항구조건을 가진 나홋카가 한인들에 의해 최초로 개척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반 단장은 "이번 답사는 13도의군 편성장소 추정과 러시아내 한인 최초마을 등 연해주 도처에 산재된 한인마을들을 지도상에 처음으로 확인, 앞으로 러시아지역 독립운동사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5. 핫산: "북, 나진-핫산 사업 한국 참여 동의"블라디미르 야쿠닌 러시아 철도공사 사장은 나진-하산 프로젝트에 한국이 참여하는 것을 북한 측이 동의했다고 밝혔습니다. 야쿠닌 사장은 오늘 세계철도연맹(UIC) 72차 총회 직후 코레일 측과 만난 자리에서 러시아가 한국과 추진하고 있는 합영회사 설립 진행사항을 설명한 데 대해 북측이 한국 참여를 흔쾌히 승낙했다고 말했습니다. 야쿠닌 사장은 또 나진항을 통해 들어오는 화물을 중국으로 운송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중국으로 철도를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으며 철도 현대화 사업은 올해 안에 착공에 들어갈 계획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나진-하산 프로젝트는 한국 정부와 러시아 철도공사가 합영회사를 설립해 블라디보스토크의 핫산과 북한 나진항을 잇는 연장 54㎞의 철도를 현대화해 시베리아횡단철도(TSR)로 연결하는 사업으로 남측의 상품을 북한과 러시아 철도를 통해 유럽으로 운송한다는 구상입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다음달쯤러시아와 합영회사를 설립한 뒤 이르면 8월부터 부산항을 출발한 컨테이너선박이 나진항에서 철도로 러시아 핫산을 거쳐 TSR과 연결되는 노선의 시범 운송을 실시할 계획입니다.

6. 발해의 역사와 강역
- 발해 /왕실계보: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당은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기 위해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으나, 유민의 저항이 심하자 치소(治所)를 요동의 신성(新城)으로 옮겼다가 30년 만인 698년에 결국 폐지했다. 이후 요동지방에는 고구려유민 중심으로 자치국인 소고구려국을 세워 9세기 초반까지 유지했다. 안동도호부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696년 무렵 전통적으로 중국 동북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중시되던 요서지방의 요충지 영주(營州)에서는 당의 압제에 시달리던 거란족이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의 지도 아래 반란을 일으켜 이 일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1년 여에 걸친 반란의 와중에서 고구려 멸망 후 강제로 이 지역에 옮겨져 살던 고구려유민과 말갈족들이 대조영과 걸사비우(乞四比羽)의 지도 아래 영주를 빠져나와 만주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저지하던 당군과의 전투에서 걸사비우가 죽자, 대조영은 말갈족들을 거느리고 당군의 추격을 물리치면서 동만주지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698년 당시 계루부(桂婁部)의 옛 땅으로 일컬어지던 지린 성[吉林省] 둔화 현[敦化縣] 육정산(六頂山) 근처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워 진국이라 했다. 현재의 아오둥산청[敖東山城]과 청산쯔산청[城山子山城]이 그 유지이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화되고,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契丹)·해(奚) 등의 압력이 가중되면서 랴오허 강[遼河]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사실상 어렵게 되자 705년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岌)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했다. 이어 713년에는 고왕(高王) 대조영을 정식으로 발해군왕에 봉해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대조영은 요서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던 돌궐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한편 당과 평화적인 교류도 계속 유지함으로써 안정과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719년 대조영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고 영토의 확장에 주력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동북 만주 일대와 연해주 남부지역이 판도에 포함되는 것은 이때였다.
발해가 적극적으로 영토확장사업을 벌이자 신라는 이를 염려해 721년 강릉 이북지역에 장성을 쌓아 대비했다. 또한 발해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헤이룽 강[黑龍江] 하류지역의 흑수말갈(黑水靺鞨)은 당과의 연계를 통해 발해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했다. 역시 발해의 세력확장을 경계하고 있던 당은 흑수말갈이 내속의 의사를 보이자 이를 계기로 726년 이곳에 흑수주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파견했다. 이같은 사태의 전개로 인해 위기감을 가지게 된 무왕은 아우 대문예(大門藝)로 하여금 흑수말갈의 정벌을 명령했다. 그러나 당과 직접 충돌이 야기될 것을 우려한 대문예는 정벌을 반대하다가 여의치 않자 당으로 망명했다. 당은 대문예를 우대하여 좌효기장군(左驍騎將軍)에 임명하고 발해의 송환요구를 거절했다. 양자의 대립은 결국 발해 수군의 산둥[山東] 등주(登州) 공격, 당·신라 연합군의 발해공격이라는 무력대결로 발전했다. 732~733년에 걸친 발해와 당·신라의 대립은 뚜렷한 결말을 보지 못하고 긴장관계가 계속되다가 737년 제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가 즉위해 평화외교정책을 펼침으로써 해소되었다.


문왕은 즉위 후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바꾸고 750년대 전반에는 도읍을 상경으로 옮긴 뒤 대내적으로는 체제정비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평화적 교역의 증대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당에서 〈당례 唐禮〉·〈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 등의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물을 들여와 사회적·문화적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안녹산(安綠山)·이정기(李正己) 등 당의 지방 군웅들을 매개로 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 향상을 기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신라·거란 등과도 빈번한 접촉을 가졌다. 793년 문왕이 사망하자 성왕(成王:大華璵)·강왕(康王:大嵩璘)·정왕(定王:大元瑜)·희왕(僖王:大言義)·간왕(簡王:大明忠) 등이 뒤를 이었으나 짧은 재위기간으로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818년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인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으로 즉위해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치고 나라의 분위기를 새롭게 했다. 이때 싱카이 호[興凱湖] 북쪽의 말갈세력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흑수말갈에 대한 통제력도 장악했으며, 당의 지배력이 약화된 랴오허 강 일대로 진출해 소고구려를 영역에 포함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했다. 기존의 3경에 서경과 남경이 추가되고 헤이룽 강 하류지역과 요동지방에 새로운 주가 설치되어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된 것도 이때였다. 당은 당시의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렀다. 830년 선왕이 사망한 후 대이진(大彛震)·대건황(大虔晃)·대현석(大玄錫)·대위해(大瑋瑎)가 그 뒤를 이었고 대인선(大諲譔)이 발해의 마지막 왕인 15대왕으로 즉위했으나 기록이 단편적으로 전하여 11대왕 이후의 즉위년·사망년·왕계(王系)는 분명하지 않다.
발해가 제10대 선왕 이후 점차 쇠퇴의 기미를 보이는 동안, 랴오허 강 상류지대와 동몽골 지역을 발판으로 성장하던 거란은 9세기 후반부터 발해의 요동지배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916년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중원으로의 진출에 앞서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발해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발해는 925년 12월말부터 다음해 1월초에 걸친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을 맞아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1월 14일 수도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했다. 발해가 멸망한 원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내부 분열이 심해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던 것 같다. 거란은 발해의 옛 땅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워 거란 태조의 맏아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발해유민의 부흥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자 928년 유민들을 요동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동단국도 동평(東平:지금의 遼陽)으로 옮겼다. 발해유민들은 12세기초까지 200여 년 간 곳곳에서 활동했으며, 상당수는 1117년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고려에 망명했다.

- 강역: 현재의 지린 성 둔화 현 일대를 중심으로 동으로는 두만강 하류 일대, 서로는 후이파 강[輝發河] 유역에 이르는 지역을 근거로 해 나라를 일으켰던 발해는 제2대 무왕, 제3대 문왕대에 걸쳐 사방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해 서로는 압록강 하류지대, 동으로는 연해주 남부 일대, 남으로는 원산만 이북에 이르는 지역을 영토로 했다. 제10대 선왕 때는 ''방오천리''(方五千里)의 대국으로 성장했다. 전성기의 강역을 전하는 〈신당서 新唐書〉의 기록을 바탕으로 영역을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남계(南界):801년에 찬술된 가탐(賈耽)의 〈도리기 道里記〉에는 압록강 하구에서 130리 상류에 있는 박삭성(泊汋城)을 발해의 서남쪽 경계로 기술했다. 그러나 이미 8세기초부터 랴오허 강 이동에 대한 당의 지배력이 유명무실해졌고, 736년에는 당과 신라 사이에 신라의 북변이 대동강-원산만을 잇는 선으로 확정된 점 등을 고려하면, 그 남계는 신라의 북쪽 경계와 맞닿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② 서계(西界):〈도리기〉에는 요서의 영주에서 안동도호부의 치소인 랴오양[遼陽]을 거쳐 발해의 장령부(長嶺府)에 이르는 길이 예시되어 있어, 9세기초까지는 남으로 압록강 하류에서 북으로 눙안[農安]에 이르는 선이 발해의 서변인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미 8세기초에 랴오허 강 동쪽에 고구려유민의 자치국인 소고구려국이 세워져 9세기초까지 존속했고, 10세기초까지는 랴오허 강 유역의 지배권을 노린 거란의 남하 시도가 계속되었으나 발해에 의해 저지되고 있었으므로, 적어도 9세기 전반인 10대 선왕의 영토확장 때는 요동 지역이 발해의 영역에 편입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③ 동계(東界):〈신당서〉 발해전의 발해15부 가운데에는 연해주 니콜리스크 일대의 솔빈(率濱)과 올가 강 유역의 안변(安邊)이 모두 부(府)의 하나로 명시되고 있어 발해의 동변은 오늘날의 연해주 남부를 경계로 바다와 접했음을 알 수 있다. ④ 북계(北界):〈신당서〉에는 수대(隋代)의 말갈제부(靺鞨諸部) 가운데 싱카이 호 일대에 있었다는 불열부(拂涅府)와 우수리 강 이동의 월희부(越喜府), 삼성(三姓) 일대의 철리부(鐵利府)가 모두 발해15부의 하나로 표기되어 있다. 더욱이 10대 선왕 때는 헤이룽 강 하류지역의 흑수부(黑水府)도 그 영향력하에 들어왔다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9세기 전반에는 북계가 동류 쑹화 강[松花江]을 따라 헤이룽 강 하류에 이르는 선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헤이룽 강 하류 이북의 흑수말갈이 그 영역으로 편입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