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대마도 역사기행
부제
  대마도는 우리땅
일시
  2012.11.04
작성일
  2013-04-09
조회수
  2834

   
 
 
 
 
 
 
 
 
 
 
 
 
 
 
 
 
 
 
 
 
 
일본이 하도 독도가 자기네들 땅이라고 우겨대서 "대마도는 우리 땅" 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역사적인 면을 더듬어 보면 독도가 일본 땅일 이유 보다는 대마도가 우리 땅일 근거가 더 강하다는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저희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에서는 임원을 비롯하여 총 15명이10월 29일부터 2박 3일 일정으로 대마도를 다녀 왔습니다. 여기에 대마도에 대한 자료와 그 곳에서 찍은 사진을 몇 장 띄웁니다. 대마도는 무비자로 부산에서 배편으로 1시간 10분이면 갈 수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당일 치기로 대마도 여행을 하고 온다고 합니다. 가는 이유야 많겠지만, 우선 경치도 아름답고, 또 면세점 물품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그리고 낚시도 즐길 수 있어서랍니다.

대마도에서는 자전거 대여도 해 주고 있고, 해안선을 도는 버스노선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돈 7~8만원이면 민박집에서 하루 1박 2식도 가능합니다. 물론 부산에서 당일, 1박 2일, 2박 3일 등 그룹단위 페키지 여행도 가능 합니다.

노래〈독도는 우리땅〉은 1994년에 정광태가 부른 대한민국의 노래이다. 독도를 소재로 박인호 (박문영)가 작사·작곡하였고, 2000년 행정구역이 변경되면서 작곡가 김창환이 재편곡하여 일부 가사가 수정되었다. 가사는 '울릉도 동남쪽 뱃길따라 이백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1절)으로 시작된다. 독도와 관련된 지리적 내용(2절과 3절)과 역사적 내용(4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우기면 곤란하다는 내용(5절)이며, 각 절은 '독도는 우리 땅'으로 끝을 맺는다. 이후 2000년 4월, 행정구역이 변경되면서 2001년 가수 정광태가 사비를 들여 작곡가 김창환의 재편곡으로 다시 녹음하였는데, 변경된 가사는 '경상북도 울릉군 도동 산 육십삼'에서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로 '세종실록지리지 오십 페이지'는 '세종실록지리지 오십쪽에', '대마도는 일본 땅'은 '대마도는 몰라도'로 수정되었다.그러나 이제 "독도는 우리 땅, 대마도도 우리 땅"이라고 가사를 다시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1. 대마도 개황
- 면적: 708 km2 <제주도 면적(1,848 km2)의 38%>
- 인구 약 3만 6천명
- 산지: 약 90%
- 최고봉: 야타네산(649 m )
- 산업: 어업 82%(주로 오징어)
- 방위: 자위대 700명
- 섬 구성: 최초 1개의 섬
(1671년과 1900년 운하 건설로 세 개의 큰 섬으로 분할)
- 지리적 위치: 부산에서 49.5㎞, 일본 본토인 후쿠오카에서는 130 여㎞
- 행정구역: 나가사키현의 소속(일본에서 4개 본섬 제외, 4번째로 큰 섬)
- 쓰시마해전(러시아 발틱함대 격파): 1905년 5월 27~28일

- 한국과의 역사 갈등:
♤ 2005년 마산시 “대마도의 날 선정”
♤ 2008년 국회의원 50명 대마도 1419년 이래 한국 땅 선언 채택, 국민여론조사 5.6% 찬성
♤ 2012.09.14 순천시의회 '일본의 독도 영유권 침탈야욕 분쇄 및 대마도(つしま) 실지회복(失地回復: 잃은 땅 되찾기)을 위한 촉구 결의안'을 의원 24명 만장일치로 결의

2. 한국관련 역사
-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 8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가 우리의 섬이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350년 전 일인들이 그 섬을 침입하였을 때 도민들은 민병을 일으켜 일인들과 싸웠던 곳이다. 지금도 섬 곳곳에 고려대장경과 불상, 도자기처럼 한국의 영향을 받은 유적이 즐비하다고 강조했다.
- 이승만 라인: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대한민국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에 의해 설정된 수역(水域)의 경계선.
이는 '한일 양국의 평화 유지'를 근본 취지로 삼고 있다고 하여 '평화선' 또는 '리 라인'(Rhee Line)이라고도 한다. 한반도에 인접한 해붕(海棚) 및 해양의 광물과 수자원을 보호·이용하기 위하여 한국이 주권을 행사한다고 선언된 이 수역은 해안으로부터 평균 96㎞(약 53해리)에 이른다. 이에 따라 이 수역 내에서의 수산업은 한국정부의 관할·감독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선을 선언하게 된 배경으로는 한일간의 어업 격차가 큰 실정에서 일본과의 어업분쟁을 예방하고 어업 및 대륙붕 자원을 보호하는 것이 시급했으며, 기존의 '맥아더 라인(1945.10.13 美軍의 일본 占有下에서 日本人이 漁業活動을 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한 線으로 모든 일본 船舶의 이동을 금지시킨 후, 정식으로 漁業活動 범위를 지정해준 선으로, 이는 日本과의 平和條約의 발효(1952.4.28)와 함께 폐지되었음)의 철폐에 적극 대처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선은 일본을 비롯해 미국·영국·타이완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어오다가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에 의해 철폐, '어업에 관한 수역'으로 대체되었다.

- 요새 이곳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만 연간 8만 여명이고, 가미쓰시마(上對馬)에 있는 백제인이 심었다는 수령 1500년 된 은행나무도 있다. 대마도는 고려시대 중엽부터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대마도 당관(對馬島 當官)’이라는 고려 관직과 ‘만호’라는 고려의 무관직을 주는 등 대마도를 종속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 그러나 고려 말, 고려·몽골 연합군의 대마도 및 일본 정벌과 일본 내부의 사정으로 인한 고려와 대마도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이후 대마도는 왜구의 소굴이 되어 조선 연안 및 중국 남부 해안에서 많은 약탈을 자행하는 전초기지가 되었다.

- 그 이후 조선은 ‘수직왜인(受職倭人-조선 정부로부터 관직을 제수 받은 왜인)’제도로 다시 대마도를 종속시켰다. 16세기 초에 나온 ‘동국여지승람’에 대마도가 우리나라 영토라는 증거가 나와 있다. 바로 “옛날에는 우리 계림(鷄林-지금의 경주)에 속한 땅이었는데 어느 때부터 왜인이 살게 됐는지 알 수 없다. 대마도는 경상도 지도안에 들어 있다”는 기록이 있다.

-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대마도는 조선의 속국(屬國)이었다. 세종대왕은 원년인 1418년 왜적의 노략질과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쓰시마 섬을 공격하고 무찌르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명장 이종무에게 쓰시마 섬을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1419년 이종무는 227척으로 대마도를 공격, 왜인들과 대적해 왜선 129척을 빼앗았다. 그리고 여러 채의 집을 불태우고 왜군을 처형했으며, 왜인에게 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들을 구해주기도 했다.

◈ 대마도가 일본 땅이 된 이유
- 지형의 80% 이상이 원시림으로 뒤덮인 이 섬에 우리는 물론, 일본도 관심이 없었다. 이종무 장군이 쓰시마를 정벌한 것도 왜구를 소탕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버려진 듯한 대마도는 일본의 전국시대가 끝나자 일본 쪽으로 들어가게 된다. 16세기 말,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의 지리와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임진왜란 침략의 전진기지’로 대마도를 이용했다. 따라서 대마도는 ‘쓰시마’란 일본식 이름으로 바뀌었고, 조선의 영향력은 약화된 반면 일본의 영향력은 강화되었다.

- 결국 임진왜란 후 대마도는 일본 땅으로 굳혀졌다. 1949년 1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일본에게 대마도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건국 직후인 1948년 8월에 대마도 반환 요구를 했으나 일본 측에서 의견이 분분하자 9월에 다시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의 항의와 미국의 맥아더 사령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독도문제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제시하는 역사적 근거와 비교해 볼 때 우리의 ‘대마도 영유권’주장은 훨씬 시기적 연원도 깊고 자료도 풍부하다.

- 한일 간의 역사를 볼 때 우리는 반드시 ‘공세(攻勢)적인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대마도 영유권 ’문제를 확대시켜 나갈 중장기적인 전략을 수립, 실행하여 현재의 독도와 같은 외교적인 문제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대마도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와 전국민적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 그 후 1877년 대마도는 나가사키현에 편입되었다. 대마도에 대한 영토권 분쟁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 이후 한 번도 제기 된 바가 없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대마도 영토 소유권에 대해 최종 합의를 선언한 바도 없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그리고 국제법상으로 충분히 의의 제기가 가능하다.

◈ 대마도 어원
- 대마도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래설이 있지만, 세 가지 설이 가장 유력하게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역사서인 ‘위지왜인전’에 나오는 진도(津島 일본어로 쓰시마)라는 설과 옛 한민족 이였던 삼한인들이 두 개의 섬이라 ‘두시마’라고 불렀다는데서 유래됐다는 설, 그리고 마치 두 마리 말이 마주보고 있는 형상으로 대마(對馬) 즉 쓰시마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이 중 일본인들은 세 번째 설이 진짜라고 주장하고 있다.

* 대마도 볼거리(관광)
◈ 1일차
☞수선사(최익현 순국비)☜구한말 대유학자이자 구국 항일투쟁의 상징인 최익현은 대마도에 유배되어 순국하였다. 장례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슈젠지(수선사)에서 치러졌으며, 유해는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슈젠지에 비를 세웠다.
☞대마역사관 자료관 (고려문, 조선통신사기념비)☜
1978년12월에 개관하여, 도내의 문화재, 고고역사 자료, 민속자료, 소문고, 조선통신사 두루마리그림 등 귀중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조선왕조 26대 고종 황재의 딸 덕혜옹주는 1931년 5월 쓰시마 번주 소다케유키백작과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정혜가 있었으며, 1955년 이혼 후 1961년 귀국한 덕혜옹주는 1989년 창덕궁 낙선재에서 별세하였다. 이 비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뜻으로 건립되었으며, 현 기념비는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이다.
☞팔번궁신사☜대마도의 대표적인 신사 팔번궁(하치만구). 이 신사는 삼한을 정벌한 신공황후를 모신 신사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출병하여 정벌에 나섰으며, 삼한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한다.

◈ 2일차 관광코스
☞카미자카 전망대☜ 표고 385m에 위치한 공원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리아스식 해안인 아소만이 눈 아래에 펼쳐지며, 멀리 큐슈본토와 한국의 산들도 볼 수 있다.
☞코모다하마 몽고군 내습지☜ 1274년 10월, 마산을 출발한 3만명의 고려와 몽고의 정벌군에게 패하여 목숨을 잃은 일본군의 혼을 달래기 위해 코모다하마 신사에서는 전사한 병사들의 위패를 모시고 매년 11월에는 코모다하마 신사 축제가 열림
☞코모다하마 신사☜ 1274년 고려와 몽고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모셔 놓은 신사로 주변경관이 아름답다.
☞이시야네 돌지붕☜ 대마도에서 채석된 판형의 돌로 지붕을 이은 고상식건물로 창고로 사용되어 왔다. 일본에서는 쓰시마 시이네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건축물로 본채에서 떨어진 곳에 마련해 풍수해나 화재의 피해로부터 재산을 보호하려 하였다.
☞비죠즈카(미녀총)☜ 대마도에 살던 백제 미녀가 천황의 궁녀로 뽑히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대마도의 남쪽 세강유역을 포함한 다테라야마 원시림의 산기슭 약 26ha가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으로 정비되어있다. 공원입구 세강 위에 걸쳐있는 구릅다리에서 강을 내려다보면 계곡 전체가 천연의 화강암으로 둘러싸인 웅대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표고 144m의 높이에 위치한 만남의 광장을 중심으로 세강의 사면에 스포츠슬라이더, 잔디썰매장, 캠프장, 삼림욕장 등이 산책로로 연결되어 있다.

◈ 3일차 관광코스
☞만관교(만제키바시)☜ 1900년 일본본해군이 함대의 통로로써 인공적으로 굴삭한 해협에 다리를 세웠으며, 이는 현재 둘로 나누어진 대마도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만조시의 조류는 여러 겹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와타즈미 신사☜ 천신과 해신을 모신 해궁으로 천신이 잃어버린 낚시 바늘을 찾기 위해 이 궁으로 내려왔다가 해신의 딸을 만나 결혼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해신의 딸은 진주를 신격화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바다의 대모신에 해당하고, 본전 정면에서 바다로 이어진 다섯 개의 도리이는 잔잔한 아소만과 용궁전설이 어우러져 신화의 세계를 연상케 한다.

☞에보시다케 전망대☜ 대마도내에서는 유일하게 360도 동서남북 사면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여기에서 보는 아소만은 몇 겹의 산과 바다 위에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 리아스식 해안 등, 그 웅대한 모습을 자랑한다. 대한해협 너머로 한국의 산들도 볼 수 있다

☞미네마치 역사민속자료관☜ 1989년 4월에 개관한 본관에는 미네쵸의 유적으로부터 출토한 고고·민속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뗀석기, 간석기, 호박이나 조개껍질로 만들어진 장신구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 전망대☜ 대마도 최북단의 와니우라의 한국전망대는 한국이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국까지 49.5Km, 후쿠오카까지의 거리는 132Km로 한국이 훨씬 더 가깝다. 날씨가 좋은 날은 부산시의 거리가 보이는 그야말로 '국경의 섬'임을 실감케 하는 곳으로, 설계단계에서부터 한국 학자에게 자문을 구해 완성되었으며, 한국산 재료 구입 및 전문가 초빙 등 철저히 한국풍을 고집하였다.

☞조선역관사 조난 위령비☜ 숙종 29년(1703년) 2월 5일(음력) 청명한 아침에 부산을 떠난 한천석 이하 108명의 조선역관 일행과 이들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측 역관 4명이 저녁 무렵 대마도의 와니우라 입항 직전에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으로 애석하게도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 비는 이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위령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