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와 한중관계
부제
  연구소 2017년 국내 학술회의
일시
  2017.08.29
작성일
  2017-09-02
조회수
  439

   
 
 
 
 
 
 
 
 
 
 
 
 
 
연구소 2017 국내 학술회의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와 한·중관계
Yun Bong-gil’s Bombing in Shanghai and
Korea-China Relations Afterwards

󰋮 일시 : 2017. 8. 29(화) 09:10-14:00
Date : at 09:10-14:00 hours, on 29 August, 2017
󰋮 장소 : 매헌 윤봉길의사기념관
Venue : Yun Bong-gil’s Memorial Hall
󰋮 주최 : 사단법인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Promoted by the Institute for East Asia Peace Studies
󰋮 후원 : 동북아역사재단, 매헌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Supported by Northeast Asian History Foundation
Yun Bong-gil Memorial Association

사단법인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Institute for East Asia Peace Studies
website : www.east-asia.or.kr

* 학술회의 식순

제 1 부 등 록 및 개 회 사

▶ 09:10-09:30 등록 및 상호 인사
Registration & Greetings
▶ 09:30-09:50 윤봉길의사 소개 영화 상영
Introductory Film of Yun Bong-gil
▶ 09:50-09:55 환영사 연구소 이사장 정병호
Opening & Welcome Address by Dr. B. H. Chouung
▶ 09:55-10:10 기조발표 윤봉길기념관 상임운영위원 이성섭 이사
Keynote Address by Mr. Seong Seob Lee
from Yun Bong-gil Memorial Association

제 2 부 세 미 나
◉ 사회 : 연구소장 이재형 박사
Panel Coordinator : Dr. Lee Jae-Hyung, President of the IEAPS
▶ 10:15-10:45 연세대 허성호 (한국 학생, EBS PD) 발표
Yun Bong-gil’s Bombing in Shanghai in Korean Perspective
▶ 10:45-11:15 성균관대 쉬춘화 (중국 유학생) 발표
Yun Bong-gil’s Bombing in Shanghai in Chinese Perspective

▶ 11:15-11:30 휴식 및 환담 Tea and Coffee Break
▶ 11:30-11:40 성균관대 찐쯔롱 (중국 유학생) 토론
Discussion by Kim Ji-Ryong (Chinese student)
▶ 11:40-11:50 서울대 이유송 (한국 유학생) 토론
Discussion by Lee Yoo-Song (Korean Student)
▶ 11:50-12:00 토론자 질의에 대한 발표자 답변
Presenters'' comments on Discussants'' Remarks
▶ 12:00-12:05 사회자 결론
Panel Coordinator''s Comments
▶ 12:05 폐회
Forum Ends

제 3 부 오찬 및 환담 : 12:10-13:10
Luncheon & Friendly Talks : 12:10-13:10


* 초대의 말씀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에 홍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서 거행된 일본군 전승축하기념식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단상 위에 도열해 있던 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 노무라 중장 등 모두 6명을 살상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쾌거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기가 살아 있음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장제스 국민당 정부로 하여금 대일항전의 기치를 높이 올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당 연구소는 2014년도에도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현대적 함의’라는 주제로 한·중·일 대학원생 위주의 세미나를 개최하여 기성세대들이 주장해 온 것과 사뭇 다른 참신함을 보여주는 알찬 학술회의였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었습니다. 이번 학술대회도 2014년과 같이 한국과 중국의 대학원생들이 발표와 토론을 전담하고, 양국 학생들은 물론 다수의 주한 외국 유학생들을 방청객으로 초청하여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를 아시아 국가 젊은이들에게 널리 알리려고 합니다. 많이 참석하시어 성원을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이 사 장 정 병 호
연구소장 이 재 형

Welcome Address by Lee Jae-Hyung, the President of IEAPS
Maeheon Yun Bong-gil’s bombing against Japanese military high ranking officials in Shanghai in 1932 was one of the most heroic achievements in Korean history in the early 20th century. The bombing became a momentum of notifying Korean people’s fearless fighting spirit to the world as well as of initiating China’s Kuomintang’s harsh attack against Japanese invaders in mainland China.
Our institute already conducted a seminar similar to this one in 2014, titled ‘Ahn Joong-Geun’s Oriental Peace’. In the seminar graduate students from Korea, China and Japan presented papers and discussed the topic. Today’s event will also be conducted by university graduate students using the same procedures as the last one.
I hope through the seminar young students from Korea and abroad will also have an opportunity to recognize the Korean people’s patriotic sacrifice during the Japanese rule in the early and mid-20th century. Thank you very much.

* 이사장 환영 인사 말씀

안녕하세요. 연구소 이사장 정병호입니다. 오늘 바쁘신 가운데도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이 행사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 연구소는 지난 2013년에는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현대적 함의”라는 주제로 한중일 대학원생들이 모여 학술발표회를 가진바 있습니다. 오늘은 “윤봉길 의사의 상해의거와 한중관계”를 주제로 하여 그 때 방식과 같이 한국과 중국 대학원생들이 발표하고 토론하는 장을 마련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에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된 일본군 전승축하기념식에서 폭탄을 투척하여 단상 위에 도열해 있던 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을 살해하고 해군 총사령관 노무라 중장 등 모두 6명을 살상하게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쾌거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기가 살아 있음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국민당 장개석 정부로 하여금 대일항전의 기치를 높이 올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번 학술회의를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개최하게 되어 더욱 의의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본 행사에 앞서 윤봉길기념사업회에서 준비한 소개 영상을 관람한 후에 기념사업회 이성섭 상임운영위원의 기조연설 후에 본 학술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회의의 사회는 당 연구소 소장 이재형 박사가 주재하며 한국 측에서 연세대 허성호 학생, 중국 측에서 성균관대 쉬춘화 학생이 발표를 하고, 중간 휴식 후에 서울대 이유송 학생과 성균관대 진쯔롱 학생이 토론을 할 것입니다.
오늘 학술회의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후원하였고, 연구소장 이재형 박사의 고등학교 동창생으로 현재 인천광역시에서 솔의원 원장으로 재직 중인 배창권 박사가 협찬하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토론 말미에는 한국에 유학 중인 여러 나라의 유학생들도 토론에 함께 참여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 아무쪼록 오늘 학술회의가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여 목숨을 걸고 항거하였던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애국선열들의 우국충정을 다시 한 번 기리고, 사드문제로 관계가 소원해진 한중관계도 과거처럼 우호적인 동반자관계로 복원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2017년 8월 29일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이사장 정 병 호

* 학술회의에 대한 연구소장의 감사 말씀
2017.08.29.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장 국제정치학 박사 이재형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두 가지 길을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나는 안일한 불의의 길을 택하여 개인의 명예와 가문의 지위, 그리고 후대에 물려 줄 재물축적을 탐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랑하는 처자를 뒤로 하고라도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하여 자기 한 목숨 바쳐 국가를 구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제 강점기의 독립유공자는 약 15,000명으로 추산되며 현재 생존하신 분은 58명이라고 합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하면 3대가 흥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제라도 독립유공자의 경우 후손 3대까지 합당한 예우를 해드리겠다는 정부의 발표는 참으로 좋은 정책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분들이 독립운동을 하도록 자금을 모아 후원하고, 전국의 사찰과 교회, 그리고 은밀한 곳에 숨어서 독립을 기원하는 셀 수 없이 많은 국민들의 염원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25세의 나이에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 나이에 윤봉길 의사는 세 권의 농민독본을 저술한 농민운동가, 새마을운동 지도자, 월진회라는 청년단체를 이끈 계몽지도자, 그리고 자기 몸을 산화하여 거사를 감행한 용감무쌍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 시급하고 절박한 것은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이라고 생각하고 상해로 건너가 김구선생을 만났던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면서 ‘장부가 집을 나설 때는 뜻을 이루지 않고는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어머님과 처자에게 작별의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상해의거 거사 2일 전에는 강보에 싸인 두 아들에게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조국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고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한 맹자, 나폴레옹, 에디슨을 생각하라”라고 유언편지를 씁니다. 이런 아버지를 둔 우리 대한민국은 장하고도 장합니다.
상해의거 거사 당일 홍구공원에는 일왕 생일과 일본군의 상해침공 전승을 축하하기 위해 1만 여명의 일본군 병력이 집결되어 있었는데, 윤 의사는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사열대에 접근하여 도열해있던 중국을 침략한 일본의 원흉 7명을 죽이거나 중상을 입혔으니 어찌 통쾌한 거사가 아니겠습니까?
중국 100대군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을 중국 땅 상해에서 한국의 한 청년이 해낸 것입니다. 거사의 결과로 당시 불편하던 한중관계도 우호적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고, 장개석 정부도 정책적으로는 물론 재정적으로도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고국이나 해외에 있던 우리민족과 동포들에게 독립투쟁의 의지를 고양시켰을 뿐만 아니라, 특히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 총통이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을 설득하여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의 연구소는 2006년 창설 이래 ‘중국 동북공정 주장의 부당성’, ‘독도영토의 수호의 당위성’, ‘한국-몽골 국가연합의 가능성’, ‘한류와 아시아 문화의 융합’,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의 현대적 함의’ 등 학술회의를 주관해 왔습니다. 또한 주한 외국대사를 초빙하여 조찬강연도 해 오고 있습니다.
오늘도 바쁘신 가운데도 이 자리에 참석하시어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다시 한 번 음미할 기회를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한중관계의 변천과 윤봉길의 상해의거
허성호(연세대)

Ⅰ. 머리말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이 터졌다. 이 사건으로 그해 1월 28일 상해를 침공한 이래 주둔하던 일본군관의 수뇌부가 죽거나 다쳤다. 일제의 침략군의 대장을 폭사한 상해의거는 1910년 한일병합 후의 항일 민족운동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뿐만 아니라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정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악화일로를 걷던 한중관계를 우호적으로 급전환시키며 한중합작에 의한 항일전선의 구축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한국인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이었다. 정규 초등교육을 거부하고 유학을 공부했으며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농촌계몽운동을 주도했던 개신유학도 출신의 25세 청년이었다.
윤봉길에 대한 연구는 선학들에 의해 활발히 진행되어왔다. 초기엔 평전류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1992년 상해의거 60주년을 전후해서 상해의거를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학술논문들이 활발히 출간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음양력 날짜의 혼용에 의한 오류, 1차 사료를 확인하지 않아 발생한 인용 상의 오류가 다수 눈에 띄나 2008년 윤봉길 탄생 100주년을 전후로 해서 사료 분석의 다양성과 정확도 면에서 크게 향상된 양상을 보인다.
또한 윤봉길의 사상에 초점을 맞춘 연구 성과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왕의 연구는 상해의거에 있어 윤봉길이 25년 인생의 절반가량을 공부한 유학 사상이 끼친 영향에 대한 고려는 다소 소홀한 채 서구의 근대 민권 사상을 결부하는 데 치중해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항일 한중협력에 투신한 윤봉길의 생애를 전통적으로 한국과 중국을 연결해온 사상 체계인 유학 사상의 수학(修學) 과정 하에서 해석, 정리해보고자 한다. 그 토대 위에 전근대 시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조공책봉과 유교, 전쟁 등으로 얽힌 한중관계의 시대상과 그 역동적인 변천을 살펴보면서 1932년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한중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최근 미국, 중국 간의 신경전 속에 한중관계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지난 100년 사이 많은 환경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기 악화된 한중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향상시킨 사건을 되돌아보는 것은 시의적절한 연구가 될 것이다.
.
.
.
4. 상해의거와 항일 한중연합

1931년 일제의 이간책이었던 만보산사건으로 인해 한중관계는 사실상의 최저점을 향해 추락했다. 그해 9월 18일 일제는 만주를 침공한다. 4개월 만에 만주의 주요 도시와 철도를 점령하고 상해로 눈을 돌려 이듬해 1월 28일 상해사변을 일으켜 중국 본토 침략의 박차를 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행된 윤봉길의 상해의거는 과정부터 결과까지 항일 한중연합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상해의거에 준비된 폭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특무기관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요청을 받은 중국군 상해 병공창(兵工廠) 병기주임(兵器主任) 김홍일(金弘壹)이 기술자 왕백수(王伯修)에게 지시해 비밀리에 제조한 것이었다. 또한 윤봉길은 선서문에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 그냥 ‘적’이 아니라 ‘중국을 침략하는 적’을 도륙하겠다고 명시하여 한국과 중국이 항일운동의 동반자임을 천명하고 있다.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하기 위하여 韓人愛國團의 一圓이 되어 中國을 侵略하는 敵의 將校를 屠戮하기로 盟誓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윤봉길, <선서문>, 1932년 4월 26일 작성


이렇게 결행된 상해의거는 중국의 관과 민, 국민당과 공산당 등 지위와 이념을 불문하고 한국에 대한 분위기를 우호적으로 급전환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상해의거에 관한 기사, 특히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가 끝내 사망한 것에 대해 “모든 시민이 폭죽을 터뜨리며 환호했다”고 통쾌해하거나 “윤봉길 지사가 곧 처형될 것 같다”고 걱정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상해의거에 대한 그들의 우호적인 감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일본은 비록 이번 전쟁이 황군의 위력을 떨쳐 보인 승전이라고 큰소리 치고 있지만 수많은 지휘관과 병사를 잃었다. 이번 전쟁으로 인하여 일본 국내의 정치상황도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번 전쟁통에 菱刈가 사망하고 野村과 植田이 부상을 입었으며 白川은 사경을 헤매고 있다.…… 菱刈가 병사한 날 저녁 백천의 사망소식이 들려오자 상해의 모든 시민들은 폭죽을 터뜨리며 환호하였다. 《上海報》, 1932년 5월 25일자


윤 지사가 투척한 폭탄에 부상을 입은 일본군사령관 白川義則이 사망하자 일본 조야는 큰 슬픔을 감추지 못하면서 동시에 윤 지사에 대한 비난의 여론이 크게 증폭되었다. 이에 일본정부는 그제 백천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는 길에 윤지사도 함께 일본으로 압송토록 하였다. 윤봉길 지사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형식적인 심문절차를 거쳐 곧바로 처형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즉 일본정부는 윤봉길을 처형하여 백천을 따라 순장시키려는 것이다.……윤 지사가 백천의 죽음에 앙갚음으로 사형에 처해진다 하더라도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上海報》, 1932년 5월 31일자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상해의거는 한중합작에 의한 항일전선의 구축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당시 중국의 실력자 장개석(蔣介石)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위업을 한국의 청년이 능히 처리했으니 장하고도 장한 일”이라고 격찬을 보냈다. 그러면서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육군 중앙군관학교에 한인장교 훈련반을 설치하여 한국인 청년 100여 명을 교육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후일 여기에서 양성된 한국청년들이 임시정부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창설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김구, 《백범일지》, 백범학술원 총서 2, 나남출판, 2002, 319~321쪽,
이는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장개석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적극 호소하여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한 것으로 이어진다.
요컨대 윤봉길의 상해의거는 위기의 한중관계를 극적으로 향상시켜 당시 중국의 집권세력인 국민당 정부의 전폭적인 도움을 이끌어냈고, 이는 국제사회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상해의거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실질적으로 한국의 독립에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꼽히는 이유이기도 하다.

Ⅴ. 맺음말

현재 한국에서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외국인은 총 66명이다. <독립유공자 포상현황>, 국가보훈처, 2017. 8. 15
그중 중국인이 31명으로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건국훈장 중 최고 훈격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장개석, 송미령 부부처럼 이 중국인 서훈자 중 대부분은 윤봉길 의거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실질적으로 지원한 국민당 계열의 인사들이다. 이러한 건국훈장 서훈 현황은 한국의 독립에는 중국이라는 든든한 동지가 있었고 후대의 한국 정부와 국민 모두 이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상해의거 이후 이러한 항일 공동전선의 구축에도 불구하고 한중 관계는 1950년 한국전쟁을 전후한 이데올로기적 엇갈림 속에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던 세력은 자유진영인 남한으로 정착했고 중국 대륙은 공산진영이 집권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한국의 독립을 가장 열렬히 지원했던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에게 패배하여 대만으로 쫓겨 갔다. 대한민국은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지원 하에 한국전쟁을 치렀고 이때 중국은 북한의 남침에 동참하여 양국은 냉전 기간 내내 대표적인 적성국으로 전락했다.
1992년 한중수교로 경제 및 문화 교류가 비약적으로 활발해지며 한중관계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긴 했으나 한반도는 여전히 미국과 중국의 대리전이 열리는 냉전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1992년 한중수교는 독립운동의 가장 굳건한 후원자였던 국민당 세력마저 적으로 돌리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반도를 둘러싼 냉혹한 국제정세는 결국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추구했던 한중관계를 그저 옛 추억으로 만들었다.
정규 신식교육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포기하고 개신유학도가 되는 길을 택한 윤봉길은 적지 않은 문명개화론자들이 걸었던 친일이나 해외유학, 반대로 위정척사론자들의 의병활동이나 근본주의적 주자학의 탐닉과는 분명히 다른 길을 걸었고 배움을 통해 다져온 사상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급격한 하향곡선을 그리다 만보산사건으로 표면화된 최악의 한중관계를 다시 항일 협력의 단계로 돌려놓았다.
한반도의 분단 상태가 계속되는 한 냉전 체제에 고착화된 한중관계는 지금과 같은 한계 <중국 인민일보 온라인매체 6·25 남침 첫 인정 기사 전송... 파문 일자 삭제>, 《중앙일보》 2017년 7월 27일자 참조
에 부딪힐 것으로 예상한다. 한반도에서의 평화 정착은 한중관계가 윤봉길의 상해의거 시기로 돌아가는 전제 조건이 될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난 세기 한중관계의 정점을 찍었던 사건인 윤봉길과 상해의거에 대한 양국의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은 지속적인 연구 상해의거에서 아나키스트 왕아초(王亞樵) 등의 자금지원, 폭탄 및 은신처 제공 등 주도적 역할을 강조한 중국학계의 연구를 분석한 논문으로는 金光載,<尹奉吉의 上海義擧와 ‘중국측 역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3, 1996를 참조. 한국 학계에서는 왕아초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으며 상해의거를 한인애국단의 독자적 거사로 해석하고 있다.
와 재조명은 그 어느 경제협력보다도 한중우호의 훌륭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 중국내 한국독립운동유적지의 보존이 한중관계에 미치는 영향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의거를 통해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쉬춘화(许春花)

1. 서론

글로벌화의 발전은 국가 간, 지역 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의 교류와 협력을 강화시켰으며, 그 구체적인 예로 1993년 11월 1일 유럽 28개국은 유럽 내 단일시장을 구축하고 단일통화를 실현함으로써 유럽의 경제와 사회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을 창립하였다. 아시아지역에서는 1989년 11월 5일부터 7일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가 환태평양지역의 경제협력과 무역 증진을 목표로 결성되었으며 매년 회원국을 돌면서 정상회의를 개최한다.
또한 경제와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들은 세계적인 범위에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실시간으로 대화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등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EU와 APEC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국가 간의 협력은 주로 지리적으로 인접한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한국과 중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유가, 불교, 한자 등 여러 측면에서 공통점이 많으며, 기원전 3세기 부여부터 지금까지 줄곧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발한 무역교류를 하였다. 현대사에 들어와서는 1992년 8월 24일 두 나라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2008년에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로 격상되었으며 한중관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 산업통상자원부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중국에 대한 한국의 수출액은 1천244억 달러로 한국 전체 수출액의 25.1%를 차지하였으며 전체 수입액은 21.4%로 수출과 수입이 모두 1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국제무역센터(ITC) 자료에 의하면 2016년 한국은 중국 전체 수출액 가운데 10.1%로 1위, 수입은 4.5%로 4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최근 한중관계는 미사일방어체계 사드의 한국배치와 그로 인한 중국의 경제보복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두 나라가 지금까지 지켜온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의 공통점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두 나라의 상호 이해를 도모하고 차이를 좁혀나가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중 두 나라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일본침략이라는 아픈 역사이다. 한국은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의 체결로 일본식민지로 전락하였으며 중국은 1931년 “9.18사변“을 기점으로 일본침략이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기 전까지 두 나라는 전쟁으로 수많은 경제적손실과 인명피해를 받았으며 전쟁의 상처는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일본의 침략전쟁 당시 한국과 중국 국민들은 일본의 피해에 맞서 함께 싸웠으며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은 1919년 4월 13일 일본의 박해를 피해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1920년에는 육군 무관학교와 간호학교를 세우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는 등 중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중국국민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909년 안중근의사의 의거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등이다.
현재 중국정부와 한국정부는 협력하여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장소였던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충칭(重慶) 임시정부 그리고 주요 의거 현장이었던 하얼빈역과 훙커우(현 루쉰공원)공원 등에 기념관을 세워 후손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일본이 항복한지 7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국 국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 국민들의 발길은 중국 인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이었던 훙커우공원에 찾아오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현지인들은 아리랑을 불러주는 등 친절을 베풀고 있다.
발표자는 윤봉길의사의 업적과 상하이의거가 중국 항일 운동에 미친 영향을 돌이켜보면서 중국내 한국독립유적지들의 보존과 홍보가 두 나라 국민들의 깊은 이해와 관계증진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쉬춘화의 글
중국내 한국독립운동유적지의 보존이 한중관계에 미치는 영향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의거를 통해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쉬춘화(许春花)

1. 서론

글로벌화의 발전은 국가 간, 지역 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의 교류와 협력을 강화시켰으며, 그 구체적인 예로 1993년 11월 1일 유럽 28개국은 유럽 내 단일시장을 구축하고 단일통화를 실현함으로써 유럽의 경제와 사회발전을 촉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유럽연합(EU: European Union)을 창립하였다. 아시아지역에서는 1989년 11월 5일부터 7일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가 환태평양지역의 경제협력과 무역 증진을 목표로 결성되었으며 매년 회원국을 돌면서 정상회의를 개최한다.
또한 경제와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들은 세계적인 범위에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실시간으로 대화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등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EU와 APEC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국가 간의 협력은 주로 지리적으로 인접한 국가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한국과 중국은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유가, 불교, 한자 등 여러 측면에서 공통점이 많으며, 기원전 3세기 부여부터 지금까지 줄곧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발한 무역교류를 하였다. 현대사에 들어와서는 1992년 8월 24일 두 나라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2008년에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로 격상되었으며 한중관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국 산업통상자원부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중국에 대한 한국의 수출액은 1천244억 달러로 한국 전체 수출액의 25.1%를 차지하였으며 전체 수입액은 21.4%로 수출과 수입이 모두 1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국제무역센터(ITC) 자료에 의하면 2016년 한국은 중국 전체 수출액 가운데 10.1%로 1위, 수입은 4.5%로 4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최근 한중관계는 미사일방어체계 사드의 한국배치와 그로 인한 중국의 경제보복으로 갈등을 겪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두 나라가 지금까지 지켜온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의 공통점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두 나라의 상호 이해를 도모하고 차이를 좁혀나가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중 두 나라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일본침략이라는 아픈 역사이다. 한국은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의 체결로 일본식민지로 전락하였으며 중국은 1931년 “9.18사변“을 기점으로 일본침략이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발표하기 전까지 두 나라는 전쟁으로 수많은 경제적손실과 인명피해를 받았으며 전쟁의 상처는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일본의 침략전쟁 당시 한국과 중국 국민들은 일본의 피해에 맞서 함께 싸웠으며 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은 1919년 4월 13일 일본의 박해를 피해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1920년에는 육군 무관학교와 간호학교를 세우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하는 등 중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중국국민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909년 안중근의사의 의거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등이다.
현재 중국정부와 한국정부는 협력하여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장소였던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충칭(重慶) 임시정부 그리고 주요 의거 현장이었던 하얼빈역과 훙커우(현 루쉰공원)공원 등에 기념관을 세워 후손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일본이 항복한지 7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국 국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 국민들의 발길은 중국 인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이었던 훙커우공원에 찾아오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현지인들은 아리랑을 불러주는 등 친절을 베풀고 있다.
발표자는 윤봉길의사의 업적과 상하이의거가 중국 항일 운동에 미친 영향을 돌이켜보면서 중국내 한국독립유적지들의 보존과 홍보가 두 나라 국민들의 깊은 이해와 관계증진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
.
.
4.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현장에 대한 보존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올해로 85주년을 맞이하였다. 한중 수교이후 2003년 12월 4일, 상하이시 훙커우구 인민정부와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는 공동으로 당시 의거 현장이었던 훙커우공원(현 루쉰공원)에 기념관을 개관하여 윤봉길의사의 업적을 기념하기로 하였다. 윤봉길의사의 호를 따서 지은 매정(梅亭)은 2층 규모의 목조건물로 윤봉길의사의 초상화와 함께 그의 일대기를 조명하는 자료와 사진 등이 중국어와 한국어로 전시되어 있다. 또한 의거현장에는 기념비를 세우고 윤봉길의 업적을 소개하는 비문을 새겼다. 개관이래 기념관은 한국 국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와 함께 상하이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의 필수 관광코스가 되었다.
기념관이 있는 훙커우공원은 현재 루쉰공원으로 개명되었으며 28.63만 평방미터의 면적을 가진 상하이의 주요 역사문화기념공원이자 중국의 첫 체육공원이다. 또한 국가로부터 AAA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공원 내에는 중국의 유명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루쉰묘와 기념관이 있어 애국주의 교육과 루쉰에 대한 다양한 기념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루쉰공원은 상하이 시민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운동을 하는 등 여가생활을 즐기는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2015년에는 자녀들의 맞선을 주선하려는 부모들이 모여 들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하였다. 중국인들이 많이 모이는 루쉰공원에 한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여가를 즐기러 나온 시민들에게는 한국 관광객들의 방문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되었으며, 한국노래를 불러주는 등 관심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행업계 종사자들 역시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다. 만약 중국내에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유적지 보존이 이루어 지지 않고 한국 국민들의 발길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과연 중국 국민들이 아직까지도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5. 결론

한국과 중국은 일본의 침략이라는 아픈 역사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 1945년 8월 14일 일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포하기 전까지 한국과 중국의 수많은 민족해방 운동가들은 국가의 경계를 초월한 두터운 우정을 나누면서 협력하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켰다. 이러한 우정과 협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견고해지고 있으며 좌절과 시련이 닥치더라도 민족해방 독립운동가들의 피로 나눈 우정이 함께 하는 한 현명하게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중국에는 현재 200만 명에 가까운 교포들이 살고 있는데, 독립운동 유적지의 보존은 민족역사에 대해 접할 기회가 적은 이들에게 민족의 자부심을 일으킬 수 있으며, 민족역사를 교육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배경에는 중국에서 활동하였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유적지에 대한 한국의 끊임없는 관심과 방문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