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일본군 위안부역사관’ 방문
부제
  <연구소 임원 ‘일본군 위안부역사관’ 방문>
일시
  2018.05.23
작성일
  2018-05-25
조회수
  231

   
 
 
 
 
 
 
 
 
 
 
 
 
 
 
 
 
 
 
 
<연구소 임원 ‘일본군 위안부역사관’ 방문>
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2018.05.23.

◈ 방문 개요: 10:30 연구소 출발, 11:40~13:00 중식(꼬기 인 갤러리, tel: 031-765-1220, 경기광주시 초월읍 설월길 8), 13:00-14:30 역사관 방문, 14:30-15:30 경안천습지생태공원(광주시 퇴촌면 정지리), 16:30 서울 도착
1.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위치 :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가새골길 85)

◈ 개설 :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보금자리인 ‘나눔의 집’의 부설 시설로서 1998년 8월 14일 개관하였다. 1988년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여성단체들이 사회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하면서 1991년 김학순을 위시로 피해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시급하게 논의된 것이 생활이 어려운 피해자들에 대한 생활지원문제였다.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과 함께 활동하던 불교인권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1992년 10월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나눔의 집을 열어 피해자들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후 나눔의 집은 혜화동 등을 거쳐 한 기부자의 도움으로 현 경기도 광주에 정착하게 되었다.

◈ 설립목적 : 정대협 등 관련 단체와 ‘위안부’ 피해자들은 수년에 걸쳐 피해 사실의 증언과 일본 정부의 사과 요구 등 열성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이에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사후에 위안부 문제가 잊힐까 염려하였다. 나눔의 집 관련자들도 나눔의 집의 미래를 새롭게 설계할 필요성을 느껴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즉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은 일본의 전쟁범죄 행위를 고발하고 피해자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위하여, 그리고 후손들에게 산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설립되었다.

◈내용 :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은 한국과 일본 등지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이루어졌다. 건립과정에 수도권 상수원 보호와 농지법 등의 걸림돌이 있었으나 1998년 8월 14일에 개관하게 되었다. 건물은 2층 구조로 300평의 대지에 총 100평 규모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 동이 지하 통로로 연결되고, 두 전시동 사이에는 계단식 야외 소극장이 있어 각종 공연이나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내부는 역사교육 공간으로서 군'위안부' 문제의 과거와 현재를 보는 전시 공간, 피해자 추모의 공간, 피해자들이 남긴 그림이나 유물 전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와 외부의 연결공간에는 관람객의 참여가 가능한 공간도 설정되어 있다. 처음 개관 이후 전시 내용은 다소간의 변화를 주어왔다. 외부에는 역사관과 나눔의 집 사이에 세워진 작은 동상이 있다. 김순덕할머니가 그린 <못다핀 꽃>을 바탕으로 윤영석이 형상화 한 것이며, 역사관 건물 옆으로는 임옥상의 <대지의 여인>이 전시되어 있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은 강덕경·김순덕 등 피해자 자신들이 그린 사진이나 유물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의의와 평가 : 할머니들의 생활공동체에 인접해 있는 점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의 이점이자 난점이기도 하다. 현재 나눔의 집은 역사관 관람객과 피해자 생활공간을 분리 운영하여 피해자의 공간을 보호하고 특별한 시기에만 개방하고 있다. 또한 역사관 및 주변 시설을 활용하여 다양한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몸으로 느끼는 역사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나눔의 집 역사관은 피해자의 삶의 현장이면서 국내외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중요한 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 ◈ 소설가 김숨 작가의 위안부 발표문 ◈ ◈

1. 돌아오지 않은 여자들, 돌아온 여자들
[세계작가대회 국제인문포럼] 전쟁과 여성의 성을 욕망하는 자들 18.01.20

19일부터 22일까지 열리는 <세계의 젊은 작가들, 평창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다> 국제인문포럼에서는 세계 문학의 미래를 맡게 될 젊은 유망 작가들을 초청하여 우정과 연대의 장을 마련했습니다. 국내외 참여 작가들은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포함한 우리 삶의 전 방면에 걸친 다양한 종류의 억압과 분쟁, 그로 인한 고통을 문학을 매개로 조망한 후 이러한 시대에서 ‘평화’의 가치를 논합니다. 여성 분야 기고글로 소설가 김숨 작가의 글을 싣습니다. [오마이뉴스]
* 1991년 오랜 침묵을 깨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알린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에서 출발한다. 그의 말하기는 다른 국내 피해자들도 증언에 나설 수 있게 용기를 불어넣었고, 나아가 국제적 ‘말하기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1992년 네덜란드계 호주인인 얀 루프 오헤른, 중국의 완아이화, 필리핀의 마리아 로자 루나 헨슨, 1994년 말레이시아의 로자린 쏘우, 1995년 대만의 황아타오 등 세계 각국에서 일본군에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생존자들이 차례로 피해를 공개 증언했다.

1) 돌아오지 않는 여자들

2017년 11월 3일 일본군'위안부' 연구회 주관으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윤정옥 교수가 깜짝 등장했다. 1988년 '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처음 알린 그녀는 1925년 생으로, 위안부 실체를 밝히고 평생을 위안부 문제 해결에 헌신했다(그녀는 1990년 11월 16일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남자들은 돌아왔는데 여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그녀가 말하는 여자들은 어떤 여자들인가. 여자들은 어째서 돌아오지 않았나.  위의 두 질문보다 앞서, 그 여자들은 도대체 어디로 떠난 걸까. 그녀도 하마터면 돌아오지 못하는 여자들 중 하나가 될 뻔했다. 1943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한 그녀는 학교 측의 강요로 정신대 자원서를 썼다.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의 권유로 학교를 자퇴하고 금강산으로 피신해 정신대로 동원되는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일제는 조선여성들을 강제징발, 근로정신대와 위안부로 삼았다. 일본 후생성은 1944년 8월 23일 <여자정신대근무령>을 공포하고 12세에서 40세까지의 조선여성을 강제징집했다. 노동력을 착취당한 근로대로 동원된 여성들 중 다수는 위안부가 되었다. 근로 정신대는 일본과 조선의 군수 공장과 방직 공장에서 하루 14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렸다.)문필기, 이효순, 최금선, 이기정. 그녀들의 공통점은 윤정옥 교수와 같은 1925년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들에게는 윤정옥 교수에게는 없는 그녀들만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녀들 모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라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던 윤정옥 교수는 해방 후 일본군'위안부'가 되었던 여성들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제에 강제 연행된 남성들이 속속 귀환하던 당시, 여성들의 귀환 소식을 찾을 수 없었던 윤정옥은 스스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연구 조사를 시작하게 되고, 이후 거의 평생을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 운동에 헌신한다.우리나라는 192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 식민지배를 받았다. 1932년 상하이에 처음 위안소를 설치한 일본군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 말부터는 대대적으로 위안부를 모집하고 점령지 곳곳에 위안소를 설치한다. 일본군대의 위안소가 세워진 지역은 '일본군이 주둔했던 모든 곳'이라고 말해진다.

본연구회에서 조사한 전위안부들이 있었던 지역도 일본본토와 대만, 조선 등의 식민지를 포함하여 중국, 만주, 남양군도 등 일본군의 점령지 구석구석에까지 퍼져 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한 지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군대의 이동에 따라, 또는 개인적 사정에 따라 여러 지역을 이동했다. 일본군'위안부'는 8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 중 살아 돌아온 일본군'위안부'는 2만 명으로 추정된다. 6만 명에서 18만 명의 여자들은, 윤정옥 교수의 말처럼 돌아오지 못했다. 2) 그녀들은 누구의 딸들인가"열세 살 때(1940년) 어린 여자와 처녀들을 또 잡으러 왔다는 소문이 들려 쌀뒤주 안에 숨기 시작했다. 마산 완월동에 있는 애들이 많이 잡혀서 만주로 끌려갔다는 소문이 났다.

그때 아버지가 완월동과 자산동 친구들을 만나보니 딸들을 많이 시집보냈다고 하시면서 일본 사람들이 호적을 보고 시집만 갔다고 하면 안 잡아간다고 했다. 시집을 가면 안 잡아간다고 해서 당시에 여자들은 영감한테도 시집가고 병신한테도 시집갔다고 했다." - 일본군'위안부' 강무자 증언 “만 열다섯 살인 1939년, 추석을 지낸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엄마와 함께 목화를 따는데, 작은 군용차를 타고 빨간 완장을 찬 일본 헌병 4명이 나타났다. (…) 엄마가 헌병 다리를 붙들고 '우리 애기를 데리고 가려면 날 죽여 놓고 가라'고 하자, 헌병은 다리로 엄마를 내리찍었다. 엄마는 밭을 구르면서 휘뜩 자빠지셨고, 그것이 엄마와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 일본군'위안부' 진경팽 증언"열여섯 살 때였다.

1932년이었을 것이다. (…) 초가을쯤 되는 어느 날 물동이를 이고 집에서 떨어져 있는 동네 우물로 나갔다. 갑자기 누가 뒤에서 내 어깨를 낚아채었다. 물동이는 내동댕이쳐졌고 나는 그들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 일본군'위안부' 최일례 증언 .....위의 증언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의 절대 다수가 10대였으며, 강제연행의 형태로 위안부가 되었다. 일본군'위안부'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에는 모두 19명의 증언이 실려 있다. 그녀들 대부분은 폭력(3명), 취업사기(13명, 공장에 취직시켜주겠다, 일본에 가면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 유괴납치(2명), 팔림(1), 기타(1명)으로 위안부가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몸이 아파서 일을 못했기 때문에 경찰서 옆에서 어머니가 야채를 파는 작은 가게를 했다. 가정 상황이 어려워서 학교는 못 다녔다." - 일본군'위안부' 오오목 증언....."아버지는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었고 집안살림이 어려웠다. 학비를 낼 형편도 못 되어 학교 입학을 미루다가 열두 살에 보통 학교에 들어갔다." - 일본군'위안부' 하순녀 증언 ....."여덟 살부터 남의집살이를 했다." - 일본군'위안부' 이용녀 증언.....증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위안부'로 강제 동원된 여성 다수는 소작농이거나 잡역, 보따리 장사를 하는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식모살이를 하거나, 공장에 다니거나 친척집에 얹혀사는 절대 빈곤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일본군'위안부'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이 담긴 <빨간 기와집>을 쓴 가와다 후미코. 어린 시절 자신의 집도 가난했지만 배봉기 할머니가 겪은 가난은 '질'이 달랐다는 고백을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1945년생인 일본작가 가와다 후미코는 1977년부터, 1991년까지 배봉기 할머니와 교류하며 증언을 이끌어냈다). ....배봉기 할머니는 1975년 10월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최초로 밝혔다. 1972년 오키나와가 미군 점령에서 벗어나 일본 영토로 복귀될 때 무국적자로 강제 퇴거 대상이 되었다. 특별체류허가서를 받기 위해 출입국사무소의 심사를 받는 과정에서 '위안부'였음이 드러났고, 살던 곳에서 쫓겨나지 않고 계속 살아가기 위해 '위안부'였음을 밝혔다.

3) 여성의 성을 욕망하는 자들
당시에는 위안소라는 명칭만으로는 무엇을 하는 곳인지 상상하지 못했다. 피해자들을 속인 말도 '군인을 위안한다, 위문한다'는 말이어서 그것이 많은 수의 남자를 상대로 성폭력을 당하는 일이라고 알아챈 여성은 없었다. "여자 한 명이 하루에 일본 군인들을 20명에서 30명까지 상대해야 했다. 워낙 변변히 먹은 것이 없어 몸이 약할 대로 약해진 여자들이 그 많은 사람을 상대하고 나면 반쯤 죽은 상태가 되었다." - 일본군'위안부' 이옥분 증언....."아침 일곱 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교대로 밥을 먹고 나면 아홉 시쯤부터 군인들이 줄을 서서 오기 시작했다. 저녁 여섯 시 이후부터는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 왔고, 자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 평균 30~40명이 와서 잠도 못 잘 정도로 바빴다." - 일본군'위안부' 김덕진 증언전쟁시 성폭력은 계획적으로, 집단적으로 행해지기도 한다. 일본군'위안부'의 경우 피해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것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극단적이고 유례없는 성폭력의 예다. 피해자 대부분이 식민지 지배에 놓인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라는 점에서 '계급 문제'도 얽혀 있다. 8만에서 20만에 이르는 조선여성들이 군위안부가 되어 성폭력에 무방비하게 놓이는 상황이 가능했던 것은, 그 여성들이 식민 지배를 받는 국가의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전쟁과 여성의 성, 전장에서의 성매매는 역사적으로 그 유래가 싶다.

매춘의 국가 통제는 유럽에서 프랑스혁명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성병이 군대 내에서 만연하자 국가가 매춘을 통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병사들에게 매춘부와 접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성병'을 예방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798년 파리에서는 의사가 매춘부를 검진한 뒤 성병 감염 사실을 경찰에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고, 1802년에는 진료소가 생겨났으며, 경찰은 모든 매춘부들의 등록을 개시했다.일본군'위안부'로 강제 동원된 여자들은 성폭력에만 노출된 것이 아니다. 그녀들은 총알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 여성의 일이라고 분류되어 온 일들을 강요받는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돌격하러 가서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는 군인들의 군복을 빨았다. 군복에 말라붙은 핏자국은 계곡에서 손이 아플 정도로 문질러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 일본군'위안부' 배봉기 증언...."죽은 군인들의 장례식에 까만 모자와 기모노를 입고 참석했다. 전쟁터에서 상처입고 돌아온 부상병들의 피도 닦아주었다." - 일본군'위안부' 최일례 증언4) 돌아온 여자들

1991년 8월 14일은 김학순 할머니는 기자회견을 통해 (국내에서) 최초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국제 사회에 알렸다. 전쟁시 제국의 군인들로부터 당한 성폭력을 고발하며, 성폭력이 다수의 식민지 지배 여성을 대상으로 행해진 반인륜적 범죄이자 전쟁범죄임을 증언했다. 그녀의 증언 이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였음을 밝히며 등록한 이는 모두 238명이다. 나머지 다수의 피해자는 끝까지 숨긴 채 살다가 세상을 떠났거나, 숨긴 채 살아가고 있다. 돌아온 여자들, 살아 돌아온 여자들의 이후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녀들 대개는 위안소에서 얻은 성병을 앓거나, 자궁이 드러내져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불임의 몸이 되어 있었다.

남자라면 총으로 쏴 죽이고 싶을 만큼 남성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과 혐오에 시달렸다. 유교 문화로부터 고착된 뿌리 깊은 순결이데올로기는 일본군'위안부'들에게 '더렵혀진 여자'라는 죄의식을 심어주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피해자임을 숨기고 수십 년 동안 침묵하게 했다. 수치심과 자격지심, 가까운 사람들의 몰이해는 위안소에서 왜곡된 그녀들의 삶을 또 한 번 왜곡했다. "동네에서 다시 정신대를 모집한다는 소리를 듣고 놀래서 어머니가 옆집에서 하숙하고 있는 남자하고 결혼을 시켜버렸다. 치료가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결혼을 해버려 병이 다 낫지를 않았던 모양이었다. 몇 개월을 살았는데 내가 매독균을 옮겨줬다고 남편이 나를 때리며 내쫓았다." - 일본군'위안부' 최명순 증언....."제대로 시집가서 사는 건 생각도 못했다.

1․4후퇴 때 청주에서 17년 연상의 할아버지를 만나 동거인으로 살았다. 남자가 싫어서 별로 의가 좋지 않았다. 자식은 물론 낳을 수 없었다." - 일본군'위안부' 이용녀 증언현재 생존해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33명이다. 그녀들의 평균 연령은 90.2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들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그녀들이 한 명도 남지 않는 이후에도 그녀들의 삶은 계속될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구 어딘가에서. 위안부 피해자 중 한 명인 김복동 할머니가 베트남 여성들에게 보내는 사죄의 글 중 일부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

"여러분들 앞에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말이 생각이 안 나요. 각 나라에서 전쟁이 없어야 하는데 서로가 전쟁을 하는 사태에서 과거에 당했던 분들께 너무나 미안하고. (…) 우리들은 이미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었지만, 앞으로 커가는 후손들과 어린아이들에겐 절대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되니, 각 국 나라들도 전쟁 없는 나라가 되도록 열심히 힘을 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작가 소개]김숨 작가는 1974년에 태어났다. 199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느림에 대하여'가,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각각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간과 쓸개> <국수> <나는 염소가 처음이야> <당신의 신>, 장편소설 <철>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바느질하는 여자> <한 명> 등이 있다.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 이호철통일로문학상 특별상, 동리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 <얀 루프-오헤른 지음 / 삼천리 / 1만 7000원>

얀 루프-오헤른: 네덜란드령 동인도(인도네시아)에 거주했다. 1942년 수녀회에서 생활하던 중, 일본군에 의해 포로 수용소에 감금됐다.[1] 1944년 스마랑 사건 피해를 당했다. 전쟁이 끝난 뒤 영국군 장교와 결혼했고, 1960년 호주로 이주했다. 1992년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이 사연은 1994년 영화 '50년의 침묵'으로 제작됐다. 2007년 미국 하원 위안부청문회에서 증언했다.

일본군의 만행은 대체 어디까지 다다랐던 걸까. 1940년대 인도네시아 땅도 일본군이 몰고 온 악행과 어둠으로 뒤덮였다. 1944년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 주둔하던 네덜란드군을 항복시켰다. 그리고 얼마 후 일본군은 민간인 가정에 들이닥쳐 아녀자들을 포로수용소로 끌고 가버린다. 악취와 오물로 가득한 수용소 생활도 잠시. 약관(스무살)의 나이였던 얀 루프-오헤른과 젊은 여성들은 다시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마구잡이로 끌려간다. 위안소였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성들만 겪은 것이 아니었다.

저자는 1994년 유럽인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밝혔다. 말 못할 아픔을 가슴에 품고 지냈던 세월만 50년. 저자는 김학순 할머니 등 한국인들이 고통을 드러내 말하는 것을 TV로 보고 용기를 얻었다.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는 그가 떠올리기조차 싫었던 그때의 기억을 옮긴 수기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그의 꿈은 수녀였다. 어머니 옷장 뒤지는 걸 좋아했던 발랄한 어린 소녀였고, 가톨릭계 학교에 다니며 수녀들의 거룩한 모습을 보고 수도 성소를 품게 됐다. 그러나 이런 꿈은 일본인들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일본인들은 잡아간 유럽인들에게 욕하고 때리며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죽는 사람이 생겨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젊은 여성들이 끌려간 곳은 ‘칠해정’이라 불린 매음굴이었다. 일본 이름으로 불린 이들은 일본군의 만행에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치욕의 고통 중에도 저자는 기도를 놓지 않았다. “사랑하는 주님, 그들이 나를 발가벗길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모두 앗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내 고통에 대한 영광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피해자의 자서전임에도 가해자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도 담겨 있다. 저자는 부끄러운 역사 또한 있는 그대로 후세에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3. 中헤이룽장성 역사기록소, 일본군위안부 만행 기록 모두 공개
중국 동북부 헤이룽장성 역사기록보관소(당안관)가 일본군 위안부 관련 문서를 추가로 공개하면서 “위안부 제도는 상업적 행위로 일본 정부와 군과는 무관한다”는 일본 우익 세력의 거짓말에 반격을 가했다. 헤이룽장성 기록보관소는 지난 2015년 8월에도 관련 기록을 공개한 적이 있지만 추가 자료를 보완해 이번에 상대적으로 완전한 기록을 공개했다. 2015년 당시 보관소는 1941년 일본군이 중국에서 위안소를 설립하는 목적으로, 한국에서 한꺼번에 2000명의 위안부를 강제 징용했다고 밝혀 충격을 줬다.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위안소는 4가지 형태가 있다. 우선 군이 직접 세운 위안소다. 이 위안소는 군이 이동 배치될 때마다 따라다닌다. 다음으로 일본인이 경영하는 민간 위안소가 있다. 하지만 이 형태의 위안소도 일본군의 지원과 감독을 받는다. 이어 군 지정 민간 기원(妓院) 형식의 위안소로, 일본 군인 뿐만 아니라 일반 일본인들도 이용이 가능했다. 마지막으로 이동식 위안소는 기차나 선박, 트럭 등에 설치됐다. 언제든 이동이 가능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기록보관소 전문가 네보신은 “이런 기록은 헤이룽장 성급 기록에서 최초 발견된 위안부 관련 기록”이라면서 “2015년 이미 중국 국가 기록물 유산 목록에 기록됐다”고 설명했다.

4.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최덕례 할머니 별세…생존 28명 2018-04-24
오늘(23일) 최 할머니께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고통과 아픔 모두 잊고 안식을 찾으시길 바란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은 23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최덕례 할머니가 별세했다고 밝혔다. 향년 97세다. 정대협은 "유족 결정으로 최 할머니의 생전 이력을 비공개하고 장례 절차도 비공개로 진행한다"고 말했다. 1921년 태어난 최 할머니는 태평양 전쟁 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들어 최 할머니를 포함해 4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별세했고, 이로써 정부가 등록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9명 중 생존자는 28명으로 줄었다.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1990년 11월 16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규명하고 생존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37개 여성·시민·종교·학생단체들이 연합해 만들었다. 1991년 한국 최초로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당시 67세)의 기자회견을 열었다.